<김주언 칼럼> 창간 6주년에 ‘체육인 여운형’을 기리며

<김주언 칼럼> 창간 6주년에 ‘체육인 여운형’을 기리며

  • 기자명 김주언 논설주간
  • 입력 2019.11.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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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계기였다. 3·1운동의 밑그림을 기획한 것으로 밝혀져 새롭게 조명받은 인물이 몽양 여운형 선생이다. 몽양 선생은 체육을 통한 민족정신 함양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조선축구협회장이던 1935년 2월 중국 상하이로 원정을 떠나는 평양축구단 환송 기념강연회에서 열변을 토했다. “운동으로 건전한 신체와 정신을 만들고 경기를 통해 투쟁심을 길러야 한다.” 체육을 통해 청년에게 민족혼을 불러 일으키고자 한 것이다. 
몽양 선생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해방직후에는 ‘건국동맹’을 이끌다가 반대파에 암살당한 통일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정치인이기 이전에 체육인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YMCA 야구부 주장으로 일본원정을 다녀왔다. 이후 축구협회장 농구협회장 탁구협회장 권투협회장을 두루 거친 만능 체육인이기도 하다. 해방이후에도 조선체육회 회장, 미군정 체육부장을 역임했다. 한국 신문사상 체육면을 따로 만든 것도 그가 사장으로 있었던 조선중앙일보가 최초였다.
몽양 선생은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한학을 배운 뒤 서울 배재학원 등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중국 유학중에는 야구선수로 활약했다. 28세에 미국인이 운영하는 난징 금릉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그는 야구를 통해 어린 학생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금릉대학을 마친 몽양은 상하이로 옮겨 인성학교를 설립하고 조선 이주민들의 자녀교육과 조국의 독립운동에 힘썼다. 1918년 상하이 고려인친목회와 신한청년단을 결성하고 총무간사로 활동했다. 1925년에는 상하이 한인체육회를 결성해 활동했다.
몽양 선생은 야구를 통해 체육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야구는 황성 YMCA의 초대총무였던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에 의해 국내에 들어왔다. 그는 당시 YMCA 운동부 주장으로 활약했다. 1912년 11월에는 YMCA 야구단을 이끌고 일본원정에 나서 와세다 대학팀과 친선경기를 하기도 했다. 이를 모티브로 한 영화가 2002년 개봉한 ‘YMCA 야구단’이다. 영화 속 이호창의 실제 모델이 몽양이었던 셈이다.
그는 야구단을 이끌고 간 필리핀에서 미국과 일본의 식민정책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조선은 20여년 전 일본에게 병합되어 스스로 발전할 기회를 잃어 독립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많은 희생자를 내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지금도 일본관헌의 압박에 대항하고 있다. 필리핀에서의 미국 정책은 표면적으로는 관대한 것 같지만 이면은 일본이 조선을 압박하는 것보다 심한 것으로 생각된다.” 연설내용이 현지신문에 보도돼 그는 위기에 몰렸다. 상하이에 돌아와 야구경기를 보러갔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됐다.
3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나온 몽양 선생은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한다. 1934년 선생이 대회위원장을 맡아 열린 제2회 조선풀마라손대회에서 양정고보 소속의 손기정선수가 우승했다. 각종 마라톤대회에서 우승을 휩쓴 손 선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다. 그는 올림픽출전 선수들에게 환송사를 했다. “제군들은 비록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고 가지만, 등에는 한반도를 짊어지고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쟁취한 손 선수의 전설 뒤에는 선생의 숨은 공로가 있었던 것이다.
몽양 선생은 8월13일자 시상식 보도에서 손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말살하도록 했다. 당시 기사를 쓴 유해붕기자는 “일본경찰의 주의가 심해졌지만 여운형 선생은 필자 보고 ‘붓대가 꺾어질 때까지 마음껏 민족의식을 주입할 것이며 그놈들의 주의를 들을 필요는 없다’고 하셨다”고 밝혔다. 조선중앙일보의 일장기 말살은 사진이 작고 인쇄상태가 좋지 않아 문제되지 않고 넘어갔다. 동아일보는 8월25일 뒤늦게 선명한 시상식 사진을 구해 일장기를 지워버리고 신문을 발행했다.
결국 동아일보와 함께 조선중앙일보도 일제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로부터 무기정간을 당했다. 이를 주도한 이길용기자 등은 경찰에 연행돼 가혹한 고문을 받고 언론기관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풀려났다. 동아일보는 9개월 뒤 복간됐다. 하지만 조선중앙일보는 9월4일자부터 자진정간 형식으로 발행을 멈췄다. 일장기 말소는 동아일보가 아닌 몽양 선생이 주도하여 조선중앙일보가 처음으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 동아일보는 조선중앙일보가 일장기말소 이후에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자 따라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몽양 선생은 해방직후 1945년 조선체육회를 재건해 초대회장과 조선올림픽위원회(대한올림픽위원회의 전신) 초대 위원장을 맡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입했다. 신생국을 국제무대에 알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1948년 런던올림픽에 참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노력으로 정부수립 1년 전에 이례적으로 IOC 회원국 승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대한민국은 선생의 노력으로 정부수립 이전에 정식으로 태극기를 내걸고 런던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다. 
예고없이 찾아온 해방 직후 몽양 선생은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사회혼란을 막기 위해 체육인을 중심으로 건국치안대를 구성했다. 그는 신탁통치를 두고 좌우가 극심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이념을 떠나 양측이 손잡는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다.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청년의 총탄에 맞아 운명했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조선체육회 주최 국제올림픽 참가 기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계동 집으로 옷을 갈아입으러 가던 길이었다. 염원했던 올림픽 경기장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는 보지 못한 채 그는 숨을 거두었다.
정부수립 이후 한국체육은 일취월장했다. 서울과 평창에서 하계 및 동계 올림픽을 치렀고, 일본과 함께 월드컵축구도 개최했다. 특히 88올림픽은 전후 폐허를 딛고 눈부시게 발전한 한국을 대외에 과시했고, 6.10시민항쟁으로 쟁취한 민주국가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평창올림픽은 경색됐던 남북관계를 화해로 전환시키는 평화올림픽으로 치러져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수많은 금메달에 국민이 환호하기도 했다. 야구 축구 등 모든 체육 분야의 눈부신 발전도 이러냈다.
몽양 선생의 유지가 한국체육의 발전을 이끌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의 체육사상은 매우 뚜렷했다. 체육의 보급과 과학화를 주장했고 여성 및 노인의 스포츠참여 또한 필수로 강조했다.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을 아울러 튼튼한 국민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의 체육철학은 선명했고 행적은 과감하고 파격적이며 열정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체육활동은 단순히 체육 자체에 그치지 않았다. 체육활동을 통해 체력과 정신력을 튼튼하게 가꾸는 것이 국력을 키우는 것이라는 믿음이 자리했다.
데일리스포츠한국이 오늘 창간 6주년을 맞았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국위를 선양하고 국민통합을 이루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체육의 생활화를 통해 국민 모두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가다듬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데일리스포츠한국이 생활체육을 널리 보급하는 데 앞장선 이유이다. 오늘 제1회 생활스포츠대상 시상식이 열린다. 수상자들에게 축하드린다. 앞으로 더욱 커다란 행사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창간기념일 아침에 몽양 선생의 체육정신을 다시금 기린다.

김주언(논설주간ㆍ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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