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 칼럼> 국정원의 사찰·조작 DNA를 없애려면

<김주언 칼럼> 국정원의 사찰·조작 DNA를 없애려면

  • 기자명 김주언
  • 입력 2019.10.24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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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 활동가를 프락치로 포섭한다. 그에게 주체사상을 교육시킨 뒤 접촉 대상자들을 만나 국가보안법 위반 발언을 유도한다. 대화내용은 은밀하게 녹음해 수집하도록 한다. 자취방에 물래 카메라를 설치해 공작대상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이를 통해 얻어낸 사찰결과를 이용해 반국가단체를 창조해낸다. 제보자에게는 사찰피해자들에게 불리한 허위진술서를 쓰도록 강요하고 진술조서도 허위로 작성한다. 프락치에게는 국가예산으로 룸살롱에서 술을 사주고 성매매까지 알선해준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정보요원의 활약상(?)이 아니다. 2015년 4월부터 지난 8월까지 국정원이 은밀하게 시행해온 방식이다. 박근혜정권 시절 시작된 민간인 불법사찰과 공안사건 조작 시도가 문재인 정부 들어서까지 자행됐다는 사실이 놀랍다. 제보자는 국정원 지시로 통일경제포럼이라는 시민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는 시민단체 관계자를 비롯해 특정대 출신 인사 수십명 등 민간인의 동향을 파악해 국정원에 보고했다. 제보자는 국정원의 지시에 따른 프락치활동을 상세하게 폭로했다. 
제보자는 국정원 지시로 피해자들의 대화를 녹음하거나 동영상을 촬영해 국정원에 전달했다.  그는 100회 이상 허위사실을 내용으로 하는 진술서를 작성했다. 진술조서 작성과정에서는 3차례 허위로 진술했다. 또한 국정원이 제공한 카메라가 설치된 방에 피해자들을 초대하여 대화내용을 촬영했다. 국정원은 불법활동을 대가로 제보자에게 매월 200만원의 기본급과 허위진술서 작성때 50만~80만원의 현금을 지급했다. 123회에 걸쳐 1억6,000만원을 주었다. 사찰 피해자들을 만나러 갈 때에는 법인카드로 룸살롱에서 술을 마시고 성매매를 알선하기조차 했다.
경제적 종속관계에 묶여 “나는 국정원의 노예였다”고 고백한 제보자는 내부고발자이다. 국정원의 범죄행위에 동조했던 공범(내부자)이었지만 양심선언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속죄하고 잘못을 참회하고 있다. 국정원의 협박에 신변위험을 느끼면서도 양심선언을 결단한 그는 국정원의 반인권 불법공작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어쩌면 ‘국정원의 노예’로 두려움과 가책 속에 살아가는 다른 프락치들이 더 있을 것이라는 의심도 지울 수 없다. 그만큼 국정원의 공작은 은밀하고 광범위하게 이뤄졌기 때문이다.
국정원은 이에 대해 “적법한 국가보안법 위반 내사사건”이라고 해명했다. 2007년 제보자가 국가보안법 위반 조직을 신고해 내사를 하다가 2013년에 중단했다. 하지만 해당조직의 추가 내사가 필요해 2014년 10월 협조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국정원은 “대상자 대부분도 본인이 직접 제보한 사람들”이라고 해명했다. 제보자는 “자발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만두려고 할 때마다 국정원의 회유와 강요가 있었다”고 반박했다. “국정원 직원들은 정권이 바뀌어도 상관없다며 ‘사업’에 지장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참여연대와 천주교인권위원회, 민변 등으로 구성된 국정원감시네트워크(국감넷)와 피해자들은 최근 서훈 이병기 이병호 전현직 국정원장 등 15명을 고소 고발했다. 국정원법 위반(직권남용) 국가보안법 위반(무고 날조) 허위공문서 작성 및 공무집행 방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국고 등 손실) 등 혐의이다. 이들은 “국정원이 사건조작을 위해 불법 정보수집과 기획 등을 지시한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적법절차원칙의 한계를 넘은 것”이라며 “국정원의 사찰 공작 날조 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고 관련자들을 엄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정원은 민간인 사찰은 물론, 간첩단이나 반국가단체를 조작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왔다. 군사정권시절에는 재야인사나 학생들을 탄압하는 정권유지의 첨병이었다. 민주화과정에서 여러 차례 명칭이 바뀌고 업무영역도 변화했다. 중앙정보부에서 국가안전기획부를 거쳐 국가정보원으로 바뀌었지만 괴물의 역사는 이어지고 있다. 국정원의 사찰과 조작 DNA는 그대로 남아 있다. 대공수사를 빌미로 여전히 반인권적 행태가 은밀하게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무런 법적 도덕적 제지도 받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직후부터 국정원을 개혁하겠다고 약속했다. 대공수사권 폐지가 핵심공약이었다. 지난해 1월 청와대가 발표한 권력기관 개혁방안의 핵심내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임기가 반환점을 돌아선 시점에서도 아직 진전이 없다. 민간인사찰과 증거조작으로 이명박·박근혜정부 시절 국정원 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원이 프락치를 동원해 불법사찰과 증거조작을 자행해왔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 정보기관이므로 대통령이 진상조사와 재발방지 대책을 직접 챙겨야 한다.   
국정원은 이번 사건을 대공수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민간인 사찰과 증거조작은 뗄 수 없는 관계다. 먼저 민간인 사찰을 통해 작은 근거를 찾아낸다. 다음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증거를 조작하여 조직사건을 만들어낸다. 서울시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은 국정원의 조작이 얼마나 치밀하게 진행됐는지 잘 보여준다. 재판과정에서조차 증거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는가. 대공수사권이라는 근원을 도려내지 않고서는 불법사찰과 증거조작이라는 범죄를 끊어내기는 어렵다.
국감넷은 최우선 과제로 국회의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국정원이 감찰실장을 검찰출신으로 교체한 뒤 내부감찰을 진행하고 있지만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회는 11월초 정보위에서 국정원에 대한 질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국감넷은 “국회가 진상을 규명하고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사찰대상자 30~40명의 명단과 수집된 정보, 녹음 프로그램과 CCTV 등을 활용한 정보수집방식의 위법성, 특수활동비 불법사용 및 국고 손실,  국정원의 프락치 활용 내사와 수사행위 실태 등을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
국회에는 여러 건의 국정원 개혁 법안이 발의돼 있다. 2년전인 2017년에는 수사권 이관과 국내 정치정보 수집금지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법안이 제출됐지만 국회에서 잠을 자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올해초 여야 협상과정에서 국정원 개혁법을 패스트트랙(신속처리) 대상에서 제외했다. 국감넷은 “진상규명 없이 국정원 일부 수사관들의 개인적 일탈로 치부된다면,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과 공작행위는 되풀이될 것”이라며 “국회가 진상을 규명하고 수사권폐지 등을 포함한 국정원법 전면 개정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국회는 국정원법 개정은 물론, 진상규명에도 별다른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동안 ‘조국 대전’에 매몰돼 막말정쟁만 일삼고 있을 뿐이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 사퇴한 이후 여당은 검찰개혁에 몰두하고 있다. 검찰권력 못지않은 정보권력의 개혁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자유한국당은 이념공세를 위해 국정원의 수사권이관을 줄기차게 반대하고 있다. 국정원 개혁은 이념의 문제가 아닌 인권의 문제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사에서 “어떤 권력도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없다”며 “모든 권력기관은 조직 자체가 아닌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민주주의의 상식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뿐만 아니라 국정원 역시 명심해야 할 말이다. 얼마남지 않은 20대 국회에서 국정원 개혁법이 처리되지 못한다면, 국정원은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국정원을 ‘음지의 권력기관’에서 양지로 끌어내 국민봉사 기관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은 촛불시민의 몫으로 남아 있다.

김주언(논설주간ㆍ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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