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서성자의 추억열차] 1970~1990년대 교단일기

[동화작가 서성자의 추억열차] 1970~1990년대 교단일기

  • 기자명 서성자 기자
  • 입력 2019.09.23 09:36
  • 수정 2019.09.2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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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너였구나!> - 2

[데일리스포츠한국 서성자 기자] 그 사건은 우리들의 기억 저편에서만 가끔씩 생각나는 아픔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한솔이를 만나다니! 이것이 무슨 인연일까?

그 날 오후, 고인과 유난히 친했던 이 선생님에게 전화를 했다.

“이 선생, 한솔이가 우리 반이 되었어. 우리 학교 그 어느 반 보다 내 반이 되어서 떠나간 C 선생도 안심하겠지?”

그 날 통화를 하면서 이 선생과 나는 참 많이도 울었다. 그 뒤 교실이 텅 빈 오후가 되면 먼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곤 했다.

“C 선생, 한솔이가 우리 반이 되었어. 나 한솔이에게 잘 할게. C 선생 몫까지”

유난히 영특한 한솔이는 엄마, 아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큰 엄마 아빠의 아들이 되어 있었기에.

나도 따로 물어 보지 않았다. 엄마가 살아있을 때 학교엔 40-50 명의 선생님들이 있었기에 한솔도 나를 기억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내가 한솔이를 껴안고 울음을 삼켰을 때 눈치를 챘을 지도 모른다.

어느 날 한솔이 입을 열었다.

“엄마가 있던 학교에서 보았던 동화책이 참 재미있었어요. 선물 받은 장난감도 생각이 나요. 선물 받은 양말은 지금도 있어요”

한솔이는 모두 다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딸을 잃은 외할머니가 가끔 학교로 한솔이를 찾아오셨다. 내가 자신의 딸과 근무했었다는 걸 전해 듣고 외할머니는 눈물을 훔쳤다. 떠난 C 선생을 생각해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을 주겠다고 외할머니를 안심시켜 드렸다.

소풍 때 따라온 동생도 보았다. 한솔이의 동생은 계속해서 엄마 젖가슴을 더듬고 있었다. 자신을 친 엄마로 알고 있다며 먼 하늘을 바라보는 한솔이 큰 엄마의 눈에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이제는 엄마 아빠가 된 목사님 내외분은 한솔이의 형제를 친자식 이상으로 잘 기르고 계셨다. 항상 한솔이를 챙겨 정답게 손잡고 가는 누나들 모습은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아이들 중 어느 하나를 특별대우를 해서는 안 되었지만 내 마음은 자동적으로 한솔이에게 쏠리곤 했다. 아침마다 성경 구절을 줄줄 암송해서 나를 감탄 시켰던 아이. 특출하게 똘똘하고 생각이 깊었던 아이. 한솔이는 1학기가 끝날 무렵 전학을 갔다. 전학을 가서도 멋진 내용의 편지를 보내주곤 했다.

3학년 쯤 되어 전주에 내려온 한솔이와 아빠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갑자기 만난 터라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하고 헤어진 것이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한솔이도 어느 덧 중학생이 되어 있을 만큼 시간이 지났다. 얼마 전 한솔이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솔이가 정말 똘똘하고 반듯하게 자랐다고.

전주, 그 수많은 학교 중에서 내가 근무하는 학교로, 1학년 많은 반 중에서 우리 반으로 들어온 한솔이. 언제나 인연의 끈은 그렇게 연결되고 있나보다.

<영재 상현이> - 1

수업시간만 되면 상현이는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안 들어와 교실 문을 살며시 열고 보면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상현이의 아버지는 미국 유학중인 박사이고 어머니는 고등학교 교사였다.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환경이 좋은 그 애가 학교에 적응 못하는 게 안타깝기만 했다.

입학 후 한 달이 지나기까지도 상현이는 수업에 흥미를 갖지 않았다. 내 수업 방식에 문제가 있나 싶어 방향도 바꾸어 보고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봐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을 돕자는 내용의 공부를 하다 예화를 소개하게 되었다.

“유태인 포로수용소에서 빵과 스프를 배급받아 먹는 사람들이 있었다. 옆 사람이 자신의 딱딱한 빵 대신 스프를 먹기 원해서 바꾸어 먹게 되었다. 그 사람도 돌처럼 딱딱한 빵보다 스프가 먹고 싶었지만 너무도 간절히 스프를 원하는 옆 사람을 지나치지 못해 항상 바꾸어 먹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죽어나갔다.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몇 사람 중에 스프를 양보하고 빵을 먹은 사람이 끼어 있었다. 그 사람을 진찰한 의사는 당신은 빵을 먹었기에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스프보다 빵에 영양분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자신도 먹고 싶은 스프를 양보하고 씹기 힘든 딱딱한 빵을 먹은 착한 마음이 그 사람을 살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상현이가 번쩍 손을 들었다.

“선생님, 그 유태인 수용소는 xx호 였구요. 그 빵을 먹은 사람은 xx 신부님 이었어요”

(지금도 나는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데일리스포츠한국 0923일자
데일리스포츠한국 09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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