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건 시인의 섬과 등대여행] <53> 군산시 어청도등대

[박상건 시인의 섬과 등대여행] <53> 군산시 어청도등대

  • 기자명 박상건 기자
  • 입력 2019.09.14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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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잡이 섬에서 서해 영해를 밝히는 어청도등대

[데일리스포츠한국 박상건 기자] 어청도는 절해고도(絶海孤島)이다.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에 속한 고군산열도는 63개 섬으로 이뤄져 있다. 이 가운데 어청도는 서쪽 영해 끝 섬으로 중국과 아주 가까이 있다. 산둥반도와 300여km 거리, 군산시에서 72km 떨어져 있다. 조선시대는 귀양지 섬이었다.

섬 면적은 1.8 ㎢, 해안선 길이 10.8㎞이다. 조선 말엽부터 충남 보령에 속했으나 1914년 옥구군에, 1989년에 다시 군산시로 편입된 섬이다. 섬의 80%가 산지로 이뤄지고 깎아지른 절벽과 바위로 이뤄져 해식애가 발달한 어업전진기지 섬이다.

어청도 딱새
어청도 딱새

특히 우럭, 돌돔, 참돔, 감성돔, 방어, 농어, 놀래기 등이 많이 잡힌다. 검은이마직박구리가 국내 최초 발견되는 등 희귀 철새 266종이 서식한다. 어청도항 앞에 사이좋게 서 있는 두 섬 농배섬은 고니의 보금자리이다. 희귀조류가 많아 조류학자 닐 무어스 등 유럽 철새탐조 여행객들에게 더 유명한 섬이다.

해조류가 귀한 섬에서 절벽 아래서 김을 뜯는 모습
해조류가 귀한 섬에서 절벽 아래서 김을 뜯는 모습

어청도는 아주 맑은 바다를 자랑한다. 바닥이 모래로 이루어져 해류활동이 활발해 수심이 매우 깊지만 그만큼 맑은 바다를 유지한다. 플랑크톤과 해조류가 적은 탓에 햇살이 그대로 투영되는 바다이다. 김, 미역, 다시마 등을 양식할 수가 없는 탓에 아낙들은 절벽과 바위를 오고가며 바위 붙어사는 돌미역과 김을 뜯는다.

“물 맑기가 거울과 같아”, ‘어조사 어(於)’, ‘푸를 청(靑)’자를 쓰는 어청도. 몇 년 전 등대 세미나 관계로 중국 칭다오대학교를 방문한 적 있었다. 당시 해양대학 학부장께서 “한국에도 칭다오(청도) 섬이 있다”며 등대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내가 “한국의 청도는 육지에 있고 감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인데요?”고 반문하자, “분명히 청도등대가 있다”고 재차 설명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혹시 군산의 어청도등대를 말하는 것이냐?”고 되묻자, 무릎을 탁, 치면서 그렇다고 했다. 한자 어조사 ‘어’는 실질적 뜻이 없으니 그는 ‘청도’로 기억했음이랴.

해식애가 발달한 뒷똥개
해식애가 발달한 뒷똥개

중국인들이 이 어청도를 기억하는 데는 그 유래가 남다른 점이 있다. 어총도 시조는 고대 중국인 전횡이다. 중국 제나라의 재상을 지내다 왕이 되었으나 한나라가 중국 천하를 통일하자 추종자 500명을 이끌고 군산 어청도에 피신하여 밭을 일구고 고기를 잡으며 최초 원주민으로 정착했다. 그러나 한왕 고종이 보낸 사자에게 붙들려 본국으로 잡혀가던 도중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그 후 백제 옥루왕 18년에 사당을 지어 전횡의 넋을 위로 하였으니 그 사당이 바로 치동묘로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돌보고 있다.

일본 역시 구한말에 어청도에 일본인 어촌을 집단적으로 건설했다. 러일전쟁 후 요동반도의 다렌을 차지한 후 오사카와 다렌을 연결하는 중간 기착지로 어청도를 삼아 정기여객선과 우편취급소를 설치했다. 19세기 후반 일본인 어부들은 어청도에서 발달한 어구를 가지고 도미, 가오리 등을 주로 조업했다. 일본인들은 어청도를 금비라섬(곤피라섬)이라고 일본식 이름으로 불렀는데 곤비는 일본어민들이 신봉하는 바다의 신으로 용(龍)을 나나내며 해상정복의 신이었다.

1849년 한반도 연안에서 조업하던 미국 포경선의 포경일지에는 “수많은 혹등고래와 대왕고래, 참고래, 긴수염고래가 사방팔방에서 뛰어 논다. 셀 수조차 없다.”고 기록돼 있다. 해방 이전 일본 주도의 포경선은 장생포 앞에서 어청도까지 밀고 올라왔다. 동해 고래가 봄에 새끼를 낳기 위해 어청도 근해로 이동하면 포경선도 고래를 따라 어청도로 이동했다.

포구에서 그물을 다듬는 어부
포구에서 그물을 다듬는 어부

어청도는 1960~70년대 고래잡이 항구로 유명했고 수많은 포경선들이 정박하며 고래 해체작업을 하던 섬이었다. 1935년에는 일본포경주식회사가 어청도에 진출하고 군산 부근에 가공공장을 설치했을 정도이다. 일본의 무차별적 고래잡이는 결국 우리바다에서 고래가 자취를 감추는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일본인들은 백 년 전에 어청도에 방파제를 설치해 항구를 만들고 항구로 오고가는 해안도로를 만들었다. 지금 어청도 도로는 그 때 처음 만든 것이고 일본 가옥, 소학교, 식당 이름마저 ‘고래등’이거나 망망대해 섬임에도 여러 잡화점과 여관이 있다.

1907년 ‘한국수산지’에는 “어청도에는 65호 297인이 살고 있었으며, 이미 일본인 40여호 200여 인이 살고 있었다. 조선사람들은 대개 어업과 농상업에 종사하였으며, 일본인의 직업은 어업 26호, 산업7호, 그 외에 교육자 조합원 요리원 목욕탕 약국 과자점 두부제조업 등이었다. 당시 어청도에 살던 일본인들은 상당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85년까지도 어청도에서는 연평균 900마리의 고래가 잡혔다. 당시 1마리 가격이 3천여 만 원에 달했다. 2006년 6월 12일에도 길이 6m, 무게 6t 가량의 밍크고래 1마리가 그물에 걸려 발견되기도 했다. 고래잡이 호황은 70년대 어청도 인구를 1만 명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현재 인구는 200세대에 230명이 거주한다.

어청항 방파제등대
어청항 방파제등대

어청도항은 ‘ㄷ’자의 움푹 파인 곳에 만들어진 천연 항구로 기상이 악화되면 피항하는 곳이다.

1989년 8월 29일부터 이틀간 어청도 바다에서는 강렬한 폭풍우가 몰아친 바 있다. 파고 5m의 해일이 들이닥쳐 선원들이 사망과 실종, 어선들이 침몰했다. 여객선이 드나드는 포구에 두 개 방파제에 또 하나의 방파제가 ‘ㄷ’자 모양으로 만들어진 이유도 그 때 같은 사고를 예방코자 함이다. 그 방파제 끝에 등대가 서서 악천후 때 안전항해의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

어청도 입구 가진여 무인등대
어청도 입구 가진여 무인등대

어청도 등대는 서해안에서 제일 먼저 무선표지(無線標識, radio beacon)를 설치했다. ‘무선표지’는 등대에서 전파를 발사하여 항해 중인 선박과 소통하면서 그 지점을 확인하는 장치이다.

고래 때 어청도 주봉인 서방산 위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원추형 석축으로 만들어져 군산 고봉산 봉수대와 신호를 주고받았다. 이후 등대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등대로 가는 대숲길
등대로 가는 대숲길

어청도 등대로 가는 길은 마을 시누대 숲길을 지난다. 꼬불꼬불 산길을 타고 40여분을 걸어 가면 산모롱이 끝자락에 서있다. 등대로 가는 산마루에 팔각정이 있다. 이곳은 여행객의 땀을 식히며 어청도 전경을 굽어볼 수 있는 전망 포인트이다. 해망도로 팔각정에서 호흡을 고른 후 다시 마을 뒤편 산등성이를 내려서는 길은 60여 미터의 절벽으로 이어진 황토길 끝에 등대는 아담한 돌담길로 에워싸여 있다.

100년 역사를 훌쩍 뛰어 넘은 어청도 등대는 1912년 3월 처음 불을 밝혔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며칠에 한 번씩 오던 배편을 이용해 기름 드럼통을 받아 지게에 지고 해발 100미터의 가파른 산길을 오고갔다. 어청도 등대는 백색의 원형 콘크리트 구조에 윗부분을 전통 한옥의 서까래 형상으로 만들어 조형미가 으뜸이다. 등대 윗부분 홍색 등롱과 하얀 등탑, 돌담이 바다를 둘러싸인 채로 등대를 껴안은 모습은 해 질 녘 석양과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다.

어청도 등대
어청도 등대

어청도 등대는 우리나라 10대 아름다운 등대 중 하나다. 불을 밝히는 등명기는 수은 위에 뜨게 하여 회전시키는 ‘중추식 등명기’이다. 12초마다 한 번씩 불빛을 쏘아주는데 이 빛은 37㎞의 먼 바다까지 가 닿는다. 고도 61m에 우뚝 선 등대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희망봉 등대를 연상시킨다.

풍랑주의보 해제 후 활기를 띠는 선창
풍랑주의보 해제 후 활기를 띠는 선창

어청도는 바람과 안개가 잦은 섬이다. 그 때 무적이 울린다. 군산항에서 풍랑주의보가 내려 몇 번씩 발길을 돌려야 했던 나는 간신히 그날 등대에 당도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풍랑주의보에 발이 묶였다. 그러나 어청도 등대원과 마을 주민들의 따뜻한 배려로 어청도 곳곳을 더욱 긴 시간 동안 꼼꼼하게 들러보는 시간이 되었다.

그날 등대원들은 기상 상황에 관계없이 기계실에서 여러 공구들을 열심히 손질하고 등명기를 관리하고 기상청에 해상 날씨를 알렸다. 인근 무인등대 이상유무도 수시로 체크했다. 외진 섬에서 묵묵히 헌신하는 등대원 때문에 오늘도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마도로스들은 외롭지 않다. 세상은 변해도 그렇게 등대는 한결같이 이름 모를 바다사람들에게 희망의 불빛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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