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 칼럼> 광복절 아침에 … ‘안익태 애국가’를 어찌할 것인가.

<김주언 칼럼> 광복절 아침에 … ‘안익태 애국가’를 어찌할 것인가.

  • 기자명 김주언 논설주간
  • 입력 2019.08.15 12:26
  • 수정 2019.08.15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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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스포츠한국 김주언 논설주간] 

올해 광복절을 맞는 감회는 여느 때와는 다르다. 연초부터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친일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열자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러나 7월 들어 일본의 무역규제가 본격화하면서 친일청산이 극일운동으로 승화하고 있다. 구호도 ‘NO 일본’에서 'NO 아베‘로 바뀌었다. 일본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감정적 대응이 아니라 극우로 치닫는 아베 정부를 규탄한다는 뜻이다. 일본 시민과 아베 정부를 구분해 ’반 아베'를 내세우는 일본시민과 연대하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다.

광복절을 앞두고 ‘안익태 애국가’를 바꾸자는 목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다. 친일은 물론, 친나치 행적까지 드러난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를 더 이상 부를 수 없다는 자성 움직임이다. ‘친일청산’의 상징으로 등장한 것이다. ‘안익태 애국가’를 부르지 말자는 주장이 국회에서도 나왔다. 국회 문체위원장인 안민석 민주당의원은 최근 씨알재단과 함께 ‘안익태 곡조 애국가 계속 불러야 하나’ 공청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는 애국가를 바꿔 일제잔재를 청산하자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윤경로 한성대 명예교수는 “역사정의 실현과 민족정기 바로잡기 차원에서 넘어갈 수 없다”고 지적했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부를 때 께름칙한 애국가는 생명력을 상실한 노래”라고 강조했다. 함세웅신부도 “익숙한 곡조인데 잘못된 것을 깨달았을 때 버리는 것이 새로운 삶”이라고 말했다. 반면 이종구 한양대 명예교수는 “성급하게 새 애국가를 만들면 결점이 생길 수 있다”고 신중론을 제기했다. 이교수는 ‘애국가 제정위원단’의 구성을 제안했다. 안의원은 “안익태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꺼내 국민에게 판단을 맡겨 보자”며 공청회 취지를 밝혔다.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는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국가(國歌)로 불려왔다. 다만 정부가 정식으로 국가로 제정하거나 채택한 것은 아니다. 관습적으로 국가로 불리다가 한국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 애국가는 1984년 제정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과 2007년 제정된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에서 국가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2010년 제정된 ‘국민의례 규정’은 국민의례 때 애국가를 제창하거나 연주하도록 했다. 그러나 애국가는 국가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노래가 아니라 안익태가 작곡한 ‘코리아 판타지’에서 따왔을 뿐이다.

문제는 ‘코리아 판타지’가 ‘만주 환상곡’을 일부 수정한 것이라는 점이다. ‘만주 환상곡’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수립 10주년을 기념하여 작곡해 일왕에게 헌정됐다. 만주국 건국을 경축하고, 이를 주도한 ‘구원자’ 일본이 되찾은 평화와 만주국을 통해 이뤄지는 세계 신질서 확립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애국가 자체가 표절이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김정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애국가 곡조가 불가리아 민요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표절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안익태가 친일부역자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선전하고 ‘일본정신’이 담긴 음악을 만들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안익태의 대표작으로는 ‘만주 환상곡’외에 ‘에텐라쿠(越天樂)’가 꼽힌다. 그는 1959년 이를 ‘강천성악(降天聲樂)’으로 개작했다. 에텐라쿠는 일본왕 즉위식 때 축하작품으로 연주됐다. 친일인명사전은 “1878년부터 근대 일본창가로서 ‘남조오충신(南朝五忠臣)’이나 ‘충효(忠と孝)’ 등 천황에 대한 충성을 주제로 한 일본정신이 배어 있는 작품”이라고 규정했다.

올해 초 안익태는 친일부역자를 넘어 친나치 행적을 보였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저서 ‘안익태 케이스’를 통해 안익태가 2차세계대전 중 나치의 재정지원을 받는 ‘독-일협회’가 주최한 여러 공연에서 곡을 지휘한 전력을 소개했다. 안익태는 1943년 7월 나치의 제국음악원 정식회원이 됐다. 제국음악원은 괴벨스가 주도한 ‘음악가 조직’이었다. 안익태는 ‘외교관으로 포장한 베를린 지역의 첩보총책’ 에하라(江原)의 덕분으로 입회할 수 있었다고 이교수는 주장했다.

조선말 갑오경장(1894년) 이후 많은 애국가 곡들이 만들어졌다. 1896년 무렵에는 10여종이나 됐다. 당시 독립신문에는 여러 가지의 애국가 가사가 신문에 게재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곡조로 불렸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기독교 찬송가 풍으로 작곡된 ‘대한제국 애국가’는 최초의 공식국가로 인정받았다. 1902년 9월9일 고종탄신일에 초연됐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애국가 작사가는 아직도 명확하게 풀리지 않았다. 윤치호설과 안창호설이 맞서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미상으로 남아 있다. 이승만정권이 1955년 조사위를 꾸려 작사자를 가리려 했지만 결론을 유보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표결에 부친 윤치호 단독 작사설이 찬성 11, 반대 2로 만장일치를 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씨알사상연구소 박재순소장은 “도산이 윤치호가 지은 무궁화가 후렴구를 가져와 애국가 본가사를 지었으며 도산과 윤치호 사이에 작사자는 ‘윤치호 이름으로 하든지 숨기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애국가를 바꾸자는 논의는 꾸준히 이어졌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아직 애국가변경 여론이 거세지 않은데다 이념논쟁이 뒤따를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안익태의 친일논란이 커지자 보수언론과 자유한국당은 친일전력을 ‘작은 허물’로 치부했다. 나아가 국가 교체요구를 ‘좌익의 선동’으로 규정했다. 일부 민주화운동 진영은 민주항쟁의 상징이 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새로운 국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항일운동가들이 부르던 독립군가를 비롯한 항일음악을 국가로 채택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논의가 무르익지는 못했다.

소리꾼 임진택 창작판소리연구원 예술총감독은 민요 ‘아리랑’ 곡조에 애국가 가사를 붙여 새로운 애국가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임 총감독은 “현재 불리는 ‘안익태 애국가’는 공식적 국가가 아니다”라며 “국가와 애국가는 개념이 다르고 국가는 하나여야 하지만, 애국가는 여럿이어도 상관없다”고 밝혔다. 그는 ‘안익태 애국가’를 부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아리랑 애국가’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임 감독은 아리랑 곡조를 편곡하여 합창곡으로 동영상을 제작하여 선보였다.

임 총감독이 아리랑을 애국가 곡조로 선택한 이유는 이렇다. “아리랑은 1926년 나운규가 제작 감독 주연한 영화 ‘아리랑’의 주제곡이다. 가사는 나운규가 썼고 편곡은 김영환이라는 음악인이 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운규 아리랑’은 오랜 시간 애국가 이상으로 사랑받아 왔다.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한국사람 누구에게나 사랑받은 곡이다. 적잖은 외국인도 아리랑을 알고 있다. 우리의 역사성과 특수성, 보편성을 모두 갖춘 곡이다. 지역과 파벌, 좌우 세대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알고 좋아한다.”

대부분 나라의 국가는 보통 독립 해방 건국 과정을 통해 축적되고 걸러져 호소력과 보편성을 갖는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이다. 많은 나라가 혁명가나 독립군가를 국가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친일부역 논란을 떠나 특정 개인이 작곡한 음악을 국가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안익태 애국가’를 어찌할 것인가. 광복절 아침에 일본의 경제침략에 맞선 ‘NO 아베’ 운동을 지켜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김주언(논설주간ㆍ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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