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특집] ‘NL 5월 이달의 선수’ 류현진, 20년 전 그 길을 먼저 밟았던 한 한국인 청년

[기획 특집] ‘NL 5월 이달의 선수’ 류현진, 20년 전 그 길을 먼저 밟았던 한 한국인 청년

  • 기자명 이한주 기자
  • 입력 2019.06.08 21:01
  • 수정 2019.06.10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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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스포츠한국 이한주 기자]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32, LA 다저스)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개막 전, “20승을 올리고 싶다”며 몸 상태에 자신감을 드러낸 그는 연일 맹활약으로 자신의 말을 증명하고 있는 중이다.

3월 29일 열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시즌 개막전(6이닝 1실점 승리)을 시작으로, 5월 한 달에만 6경기에 등판해 5승 무패 평균자책점 0.59(42.2이닝 3실점)의 성적을 기록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류현진은 내셔널리그 5월의 선수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한국인 선수로 이달의 투수상 수상은 류현진이 두 번째다. 그보다 약 20년 앞서 박찬호는 한국인 최초로 이 상을 받는 등 화려한 족적으로 현재 류현진이 걷고 있는 길을 개척했다.

본지에서는 외롭고 높았던 미국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제일 먼저 밟았던 박찬호에 대해 재조명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단순히 잘하는 야구선수가 아닌 ‘민간 외교관’ 박찬호

전성기를 보냈던 LA 다저스 시절 박찬호. <사진=연합뉴스>
전성기를 보냈던 LA 다저스 시절 박찬호. <사진=연합뉴스>

공주고, 한양대 출신 박찬호는 학창시절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고교시절 타자로 활동해 투수로서 경험이 많지 않았고 동시대 또래 선수들이 조성민, 임선동, 정민철 등 야구계의 황금기로 불렸던 ‘92학번’의 주인공들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박찬호의 잠재력을 높게 봤다. 투수를 오래 하지 않아 어깨가 비교적 ‘싱싱’했고 제구력은 아쉬웠지만 160km에 가까운 강속구를 던질 수 있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마침내 1994년 1월 11일 미국프로야구 전체 역사를 통틀어도 열일곱 번째에 불과했던 ‘메이저리그 직행’과 계약금 120만 달러의 특급 대우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입단했다.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다저스는 연고지에 밀집한 한인들을 위해 잠시 박찬호의 얼굴을 선보인 뒤 마이너리그로 내려 보내 본격적인 조련을 시작했다. 박찬호는 약 2년간 메이저리그에 비해 대우가 좋지 않은 힘든 마이너리그 생활을 특유의 뚝심과 성실함으로 홀로 견뎌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1996시즌 개막 전 스프링캠프에서 연이은 쾌투로 개막 엔트리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마침내 4월 7일 시카고 컵스와 원정 경기에서 다저스 선발 투수였던 라몬 마르티네스가 부상을 당하자 구원 등판해 4이닝 동안 18타자를 상대로 7개의 탈삼진을 뽑으며 승리를 기록했다. 한국인 투수의 메이저리그 첫 승이었다.

이듬해부터는 거칠 것 없었다. 14승(8패)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두 자릿수 승리를 따낸 것을 시작으로 1998시즌에는 7월 한 달간 6경기 43.2이닝 동안 4승 무패 평균자책점 1.05의 성적을 기록, 이달의 선수에 선정되기도 하는 등 더욱 단단한 모습을 보이며 15승(9패) 3.7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1999년 13승(11패)으로 잠시 ‘주춤’했던 박찬호는 2000시즌 본인의 커리어 하이 시즌을 달성했다. 특히 9월 30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전에서는 생애 첫 완봉승을 올리기도 했다. 최종 성적은 18승(내셔널리그 5위)과 평균자책점 3.27(내셔널리그 7위), 피안타율 0.214(내셔널리그 2위).

2001년엔 허리부상에 삐끗하면서도 15승과 218개의 탈삼진을 수확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특히 이 시기 박찬호의 성적은 훗날 많은 선수들이 약물을 사용했다고 밝혀진 ‘스테로이드 시대’에 거둔 기록이기 때문에 더욱 빛났다.

박찬호의 성공은 단순히 개인의 영광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등 경제위기로 실의에 빠져 있던 국민들은 박찬호가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습을 보며 그 순간만큼은 좌절을 잊고 하나로 뭉쳐 환호했다.

미국에 한국문화를 알리는데도 기여했다. 매 경기 시작에 앞서 심판에게 90도로 깍듯하게 인사했다. 다른 외국인 선수들이 영어를 배우는 것을 기피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영어를 습득하는데 노력, 미국선수들과 서슴없이 어울렸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에 대해 극빈국으로 알고 있던 미국사람들은 박찬호 덕분에 한 층 좋은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보게 됐다.

정상에서 찾아온 시련 그러나 목표를 잊지 않고 거둔 124승

박찬호 야구 인생의 첫 시련이었던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사진=연합뉴스>
박찬호 야구 인생의 첫 시련이었던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사진=연합뉴스>

박찬호는 2001시즌을 마치고 자유계약선수(FA)로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무려 6500만 달러를 받으며 계약, 인생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후 박찬호에게 가혹한 시련이 닥쳐왔다. 타자 친화구장이었던 텍사스 홈구장 알링턴 볼파크 적응에 실패했고 고질적인 허리부상과 스프링캠프에서 얻은 햄스트링 부상 등이 박찬호를 괴롭혔다.

결국 이적 첫 해 9승(8패) 평균자책점 5.75의 초라한 성적을 시작으로 이듬해엔 허리 부상의 여파로 고작 7경기에 나와 1승(3패)을 거두는 데 그쳤다. 2004년에도 4승(7패)밖에 올리지 못해 '먹튀'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2005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옮겨 통산 100승 고지를 밟고 시즌 12승을 올리며 부활하는 듯했지만 상승세는 금방 꺾였다. 다음해 샌디에이고에서 7승을 올린 것을 마지막으로 뉴욕 메츠, 휴스턴 애스트로스 등 자주 팀을 옮겨 다니는 ‘저니맨’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또한 나이가 30대 중반에 접어들며 여러 가지 부상에 시달렸다.

그러나 박찬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겐 분명한 동기 의식이 있었다. 바로 전 동료 노모 히데오(통산 123승)가 작성한 아시아 투수 최다 통산 승리였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박찬호는 목표를 잊지 않고 꾸준히 운동했다. 결국 본인이 직접 구단에 연락하고 테스트를 받는 과정을 통해 2008년 친정팀 다저스에 복귀했다.

박찬호는 예전처럼 팀의 중심 투수는 아니었지만 살아난 구위를 바탕, ‘마당쇠’ 역할로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꾸준히 활약했다.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메이저리그 아시아 통산 최다승(124승)을 올렸던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시절 박찬호 <사진=연합뉴스>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메이저리그 아시아 통산 최다승(124승)을 올렸던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시절 박찬호 <사진=연합뉴스>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뉴욕 양키스 등을 거쳐 박찬호는 2010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유니폼을 입었다. 마침내 같은 해 10월 2일 플로리다 말린스전에서 3-1로 앞선 5회말 구원 등판해 3이닝을 6탈삼진 무실점으로 막아 124승을 올리며 아시아 투수 최다승 기록을 경신했다. 이후 일본무대와 한국무대를 거친 박찬호는 2012시즌이 끝나고 은퇴를 선언했고 모두의 축복 속에 2014년 성대한 은퇴식까지 가지며 프로생활을 마감할 수 있었다.

약 20년 전 한 한국청년이 고군분투하며 외롭게 개척한 길은 이후 김병현과 김선우, 서재응 등이 거쳐가 현재 류현진이 밟고 있다.

부디 류현진이 ‘선구자’ 박찬호가 닦아 놓은 길을 꾸준히 완주해 박찬호가 이룩했던 통산 아시아 최다승까지 경신하는 그날을 기다려본다.

현재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투수로 발돋움한 류현진(좌)과 박찬호 <사진=LA 다저스 트위터 캡쳐/연합뉴스>
현재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투수로 발돋움한 류현진(좌)과 박찬호 <사진=LA 다저스 트위터 캡쳐/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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