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지만, 가볍지 않은 시인의 노래

가난하지만, 가볍지 않은 시인의 노래

  • 기자명 박상건 기자
  • 입력 2019.05.03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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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풍경이 있는 아침] 34 박철,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다시 한 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에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 박철,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전문

 

이 시는 일상생활 속의 소재와 공간을 그대로 옮겨놓은 스토리텔링이다. 그런데도 감성과 산뜻함에 서정적 가락이 큰 울림을 준다. 아내가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외상값을 갚으라고 준 4만원은 들고 ‘자전거를 타고’ 나서다가 유혹의 덫에 걸리고 만다.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다시 한 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화원 앞에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맥주만 마신 게 아니라, 재스민을 샀다. 진정성이 살아난 이유다.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아내는 돌아서서 나를 바라보았다/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가족 풍경 속에서 무능한 가장은 풍경 밖의 조연으로서 “어느 한쪽,/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자괴감과 답답함에 휩싸였다.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라는 또 다른 동일성에 기대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 시의 화룡정점은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의 유기적 연관성과 대조적 풍경이다. 여기서 스토리가 갈무리될 법도 한데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내겐 아직 멀고 먼/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라는 한 풍경을 더 설정해 스토리 완결성을 고려했다. 시인은 “아직 멀고 먼/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가 숙제이지만 아이의 숙제는 미래 지형적이다. 현재 아내는 답답한 사건은 ‘설거지’하고 있다.

시적 체험 공간인 80년대와 시집이 나온 90년대 상황, 그리고 다시 이 시를 읽는 2019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시인의 경험과 시인 또래 소시민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한결 같다. 시대가 변해도 그대로 읽히는 시는 좋은 시이다. 오히려 시대가 변할수록 시인의 작품은 ‘더’ 순박한 가장의 일기’, ‘진정한 시인의 노래’로 다가온다.

박철 시인은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단국대 국문과를 졸업했고 1987년 ‘창작과비평’에 ‘김포’ 외 시편들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김포행 막차’, ‘밤거리의 갑과을’, ‘새의 전부’, ‘너무 멀리 걸어왔다’, ‘험준한 사랑’ 등이 있다. ‘천상병시상’, ‘백석문학상’, ‘노작문학상’을 수상했다.

박상건(시인.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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