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 칼럼> ‘양승태 사법농단’과 긴급조치 피해자 배상

<김주언 칼럼> ‘양승태 사법농단’과 긴급조치 피해자 배상

  • 기자명 김주언 논설주간
  • 입력 2019.05.02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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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사과정에서 고문 등 구체적 불법행위가 있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대통령이 긴급조치를 발령한 것이 헌법을 위반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고의에 의한 위법행위이므로 국가의 배상책임이 인정된다.” 지난달 19일 서울중앙지법이 내린 1심판결이다. 수사나 재판과정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하지 않았더라도 긴급조치 발령행위 자체가 불법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긴급조치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므로 불법행위가 아니라는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에 반기를 든 것이다.

재판부는 긴급조치가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대법원 판례에 공무원의 ‘고의’에 의한 위법행위를 추가했다. “당시 대통령은 긴급조치 1호 발령이 유신헌법에서 정하고 있는 요건과 한계를 준수하지 않았고, 긴급조치 1호에 의한 수사·재판 등에 의해 국민의 기본권이 심각하게 침해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 1호를 발령했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긴급조치 1호 발령행위는 대통령의 의무를 위반한 행위에 해당한다.”

정부측은 불법 구금이나 고문 등 가혹행위 증거가 없기 때문에 배상책임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1호 발령행위가 공무원의 고의에 의한 위법행위에 해당하고, (피해자가) 긴급조치 1호에 의한 수사·재판에 의해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받았다고 인정한 이상 수사기관이 불법으로 구금하거나 가혹행위를 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국가의 배상책임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성립하려면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이 인정돼야 한다.

양승태 전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은 긴급조치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해 위헌이지만 긴급조치 발동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기 때문에 불법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국가배상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이었다. 헌재도 지난해 민주화보상금을 받았더라도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을 별도로 받을 수 있다고 결정해 구제범위를 넓혔다. 그러나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을 취소할 수는 없다고 결정했다. 헌재 결정이후 피해자 손을 들어준 판결은 대부분 긴급조치 발령 자체가 아닌 가혹행위 때문에 불법으로 인정했다.

양승태 대법원이 ‘모순된 판결’을 내린 이유는 사법농단 의혹에서 단서가 드러났다. 양 전 대법원장이 2015년 8월 청와대에서 박근혜 전대통령을 면담하며 상고법원 도입 필요성을 설명했고 긴급조치 배상판결을 국정운영 협조사례로 든 사실이 확인됐다. 양 전대법원장는 청와대에 미리 보낸 말씀자료를 통해 ‘긴급조치 유죄로 1,140명에 평균 5억원 배상 판결, 5,500억원을 대법원 판결로 전액 면제됨’이라며 치적을 자랑했다. 상고법원 설치를 위한 청와대 설득방안으로 모순된 판결은 예정된 결론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2015년 10월에는 법원행정처가 국가배상청구를 인정한 재판장의 징계를 시도했다. “대법원에 반하는 판결을 내린 판사를 놔두면 앞으로 대법원 입장과 다른 판결이 또 나올 수 있다는 이유”였다. 판결을 이유로 판사를 징계한 전례가 없다는 내부보고가 올라오자 해외에 연수중인 판사들에게 법관 징계사례를 수집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법원행정처 컴퓨터 조사에서 문서로 확인된 내용이다. 사법권 독립을 침해했다는 점에서 박 전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못지않은 위헌범죄이다. 양 전대법원장은 현재 사법농단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과거 유신정권에서 긴급조치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피해자는 1,100여명에 이른다. 영장 없이 체포돼 가혹행위 등 엄청난 불이익을 당했다. 출소 후에도 직장을 잡지 못하고 청춘을 통째로 날려버리기 일쑤였다. 수개월 옥살이를 한 뒤 기소유예 등으로 재판에 넘겨지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하면 피해자는 훨씬 늘어난다. 이들중 일부는 재심에서 무죄를 받아 국가배상을 받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이 청와대와의 검은 거래 때문에 다시 한번 피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사법살인’으로 일컬어지는 인혁당사건 피해자들은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신정권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긴급조치 4호)의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하여 사건을 조작한 뒤 관련자 8명을 사형에 처했다. 그로부터 30년이 훌쩍 넘은 2007년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됐다. 피해자 77명은 개인적으로 국가배상소송을 통해 2009년 위자료 및 지연손해금으로 총 490억원을 가지급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1년 지연손해금 가산점을 34년 늦췄다. 당시 금액으로 211억원의 초과 가지급금이 발생한 것이다.

국정원과 법무부는 2013년 이들을 대상으로 부당이득 반환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2017년 국가에 부당이득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피해자 34명은 임의 변제하고 나머지 34명은 환수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9명에 대해서는 부동산 경매와 예금 채권 압류 등이 진행되기도 했다. 이들이 부담한 반환금은 받은 금액을 초과했다. 게다가 아직 갚지 못한 사람들이 반환해야 할 금액은 받은 금액의 2배로 늘어났다. 손해배상금을 받기 전보다 오히려 생활이 악화하거나 빚이 쌓여가는 형편이 된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최근 “국가는 조작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을 일으키고서도 조직적 은폐시도를 지속했고, 구제조치를 외면했음은 물론, 피해자들에 대해 불이익 조치를 자행 또는 방조했다”고 지적했다. 인권위는 “국가가 법원판결을 이유로 피해구제의 책임을 외면한 채 피해자들에게 경제적 고통을 가하는 상황은 형평과 정의에 현저히 반한다”고 질타했다. 인권위는 문재인대통령에게 ‘완전하고 효과적 구제방안을 마련하여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긴급조치 피해자 국가배상에 대한 최종판단은 대법원의 몫이다. 전원합의체에 회부하여 잘못된 판례를 바로잡아야 한다. 전원합의체는 김명수 대법원장을 포함해 대법관 13명으로 구성되며 출석인원 과반수 찬성으로 결정을 내린다. 13명중 8명이 문재인정부에서 임명됐기 때문에 가능성은 남아 있다. 특별법을 통한 일괄적 해결도 가능하다. 사법농단으로 판결이 확정되거나 소멸시효가 지난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특별법 제정을 통해 일괄 구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국회에는 이미 ‘사법농단 피해자 구제법’(박주민 민주당의원)이 발의돼 있다.

긴급조치에 따른 피해회복은 일찍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명예를 회복하려는 이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과거사정리에 대한 역대 정부의 소극적 태도와 외면, 사법부의 정치적 판결이었다. 이제 가장 공정하다고 믿었던 사법부마저 권력을 탐하며 재판을 이용하는 기관으로 판명이 났다. 법에 의해 구원받고자 했던 피해자들의 노력이 허망하게 여겨질 뿐이다.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재판은 이제 시작됐다. 재판결과가 어떻게 끝날지도 미지수이다. 그러는 사이에 피해자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긴급조치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명예회복과 피해를 배상받기 위해 수십년을 기다려왔다. 일부는 가정을 잃었고 일부는 고인이 됐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사법제도가 옳고 그름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실규명의 때를 놓쳐서는 안된다. 문재인정부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이들에 대해 보상과 예우를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긴급조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과 예우는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보상하고 예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김주언(논설주간ㆍ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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