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설을 뚫고 우크라이나 평원에 피어날 붉은 해바라기

잔설을 뚫고 우크라이나 평원에 피어날 붉은 해바라기

  • 기자명 송종찬 위원
  • 입력 2023.02.0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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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침공하던 2014년 겨울, 우크라이나 평원은 백색이었다. 간밤에 마신 술로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 속을 달리다 보니 그동안 지었던 죄가 탈색되어 새로 태어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인 오뎃사까지는 490km. 몇 번을 보아도 물리지 않았던 영화 '해바라기'를 생각하며 필름을 돌리듯 우크라이나 평원 위를 달렸다.

'해바라기'는 전쟁과 사랑을 테마로 한 영화다. 2차 세계대전 중 신혼의 단꿈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탈리아인 안토니오는 러시아전선으로 끌려 나갔다. 전쟁이 끝나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아내 지오반나는 러시아로 남편을 찾아 나섰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토록 기다렸던 남편은 목숨을 구해준 러시아 여인과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때늦은 재회와 돌아설 수밖에 없는 운명 앞에서 아내 역을 맡은 소피아 로렌은 통곡한다. 전쟁이 갈라놓은 비극적인 러브스토리였다.

영화가 영화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우크라이나 평원에 다시 전쟁의 포성이 시작된 지 만 1년이 되어간다. 전쟁은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고, 지면과 영상을 통해 전해지는 참상에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드네프르 강변, 동굴수도원, 오뎃사 광장에서 만났던 순박한 우크라이나인들, 그들의 절망이 얼마나 깊은 지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나는 헤아릴 수가 없다. 형제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러시아 군인들도 잔인한 운명 앞에서 좌절하고 있을지 모른다.
러시아 침공 이후 18세 이상의 우크라이나 남자들은 국경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키예프역에서, 리비우역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국경 밖으로 떠나보내며 나누는 작별의 키스.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약 없는 이별 앞에서 사람들은 속수무책이다. 우크라이나 인구 4100만명의 30%인 1300만명이 피난길에 올랐다고 한다. 떠나지 못한 사람도 편할 리가 없다. 미사일 공습이 있을 때마다 지하철역으로 피신해 촛불을 켠 채 겨울밤을 보낸다. 촛불에 흔들리던 어린아이들의 눈망울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전쟁이냐고 묻는다.

가해자인 러시아도 사정이 다르지는 않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는 동슬라브계로 원래 같은 민족이다. 지금도 러시아 가정의 25% 정도가 우크라이나에 친인척을 두고 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러시아는 군 경력자를 대상으로 징집령을 발동했다. 전쟁을 지난 세기의 일로 알고 살았던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전선으로 끌려 나갔다. 톰스크, 옴스크, 이르쿠츠크 등 극동지역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실으며 연인과 나누는 이별. 전쟁의 잔인함을 잘 알고 있는 노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러시아는 혁명과 전쟁의 나라다. 차르의 오랜 전제정치, 러시아혁명, 1,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인의 삶 속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픈 기억은 2차 세계대전이다. 서구의 시각에서 미국 중심의 연합군이 승리한 것으로 규정하지만, 사실상 러시아에 의한 승리였다. 독일군을 물리치고 베를린에 승리의 깃발을 꽂은 나라가 러시아였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러시아 인구의 약 18%인 26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금도 가정마다 아버지나 아들, 혹은 남편을 떠나보내야 했던 전쟁의 기막힌 상처들을 안고 산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도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독일군은 포탄도 아깝다며 871일 동안 도시를 봉쇄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했다. 생존을 위해 쥐를 잡아먹고, 먹을 것이 없어 심지어 인육까지 먹었다는 설도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전쟁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는 러시아가 형제와 같은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수많은 전문가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러시아가 손쉽게 이기리라는 전망도 사라지고 전쟁은 1년여를 넘어 언제 끝날지 모를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선 예상할 수 있는 전쟁은 없다는 점이다. 전쟁은 논리적이지 않고 부지불식간에 찾아든다. 또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은 하지 않는다. 이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우크라이나 여류작가 스테틀라나 알렉시에비치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그만큼 잔인하다. 전쟁 앞에 소중한 일상과 꿈, 그리고 사랑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마지막으로 젤렌스키 주연의 비극이라는 말이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서방으로부터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국민들은 피를 흘리고 있다. 리더의 책무는 무엇인가. 꿈꾸는 이상은 멀고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가깝다.

경기침체와 전쟁이 아니더라도 올 겨울은 유난히 춥다. 강원도 산간 지역이 영하 20도 아래까지 내려갔으니 우리나라도 러시아만큼이나 추웠다. 이 엄동설한에 전선에서 고향하늘을 그리워하고 있을 병사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그들 중에는 포탄에 맞아 눈밭 위에 붉은 피를 쏟으며 쓰러져간 병사도 있으리라. 밤새 눈은 다시 내려 피를 뒤덮고 그 위에 안개가 피어날 것이다. 잔인하게도 봄이면 피를 머금고 피어날 어린 생명들, 우크라이나 평원에 해바라기는 다시 지천으로 흐드러질 것이다.

Don’t cry for UKRAINE. 우크라이나인은 울지 않는다. 전장에 총성이 멎으면 달려가 보리라. 성소피아 성당에 들러 인간이 저지른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푸른 물결 넘실대는 드네프르 강변으로 나가 별들을 바라보며 먼저 떠난 젊은 넋들을 위해 가지런히 두 손을 모을 것이다.

<붉은 해바라기>
평원에 핀 해바라기/누구를 기다리며/속이 타들어 갔는가
남편은 전장으로 떠나고/빈 들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가에/해바라기 핀다
기적소리 울릴 때마다/그대 오실까/맨 발로 뛰쳐나가본다
눈 내린다고/안개가 설원을 뒤덮는다고/잊혀질 수 있을까
가없는 우크라이나 평원 위에/입술을 깨물고 피어난 붉은 해바라기
새카맣게 속이 타 들어가도록/누구를 기다린다는 것은

송종찬(독자권익위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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