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순국선열과 을사늑약을 다시본다

오늘, 순국선열과 을사늑약을 다시본다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2.11.16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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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수학능력 시험을 치는 오늘(11월 17일)은 제83회 순국선열의 날이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제에 강탈당한 을사늑약이 맺어진 117년이다. 또한 한말 전재산을 털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우당 이회영선생의 순국 90주년이다.

순국선열의 날은 1939년 11월 2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제31차 회의에서 법정기념일로 제정하여 8.15 광복으로 환국할 때까지 해마다 거행되었다. 참고로 임시정부는 3월 1일을 독립선언일, 4월 11일을 헌법공포일, 10월 3일을 건국기원일로 하는 3개 국경일로 기념해오다 순국선열의 날을 추가하여 4대 국경일로 정하고 기념하였다.

임시정부의 환국 후 사회혼란과 6.25한국전쟁 등으로 순국선열의 날은 기념되지 못하다가 1997년 5월 9일 ‘순국선열의 날’을 정부기념일로 제정ㆍ공포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여기서 ‘순국선열’에 대한 규정은, 명성황후 피살일(1895.8.20)로부터 광복 전일(1945.8.14)까지 조국 독립을 위해 순국하시고 그 공로로 건국공로훈장을 받으신 분으로, 그 범위와 유형은 1960년 보사부 ‘순국선열 요(要) 선정회의’에서 의결된 ①전사(戰死), ②형사(刑死), ③절사(節死), ④피살(被殺), ⑤옥사(獄死), ⑥옥병사(獄病死) 등 6개항에 해당하는 분이다.

이에 해당하신 순국선열은 15만여 명으로 추정하는데, 국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건국 공로훈장을 수여한 분은 3500여 명이며, 그 중에 국가보훈혜택을 받는 후손은 804명에 불과하다. 임시정부 의정원은(1939. 11. 21) 매년 11월 17일 전국 동포가 공동히 기념할 ‘순국선열기념일’로 정하자는 지청천ㆍ차리석 등 여섯 의원의 제안을 원안대로 통과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국선열을 기념할 필요에 대하여는 더 말할것도 없고, 다만 순국한 이들을 각각 일일이 기념하자면 번거한 일일뿐더러 무명선열을 유루없이 다 알 수 없으므로 1년 중에 1일을 정하여 공동히 기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인한 바이요. 이제 11월 17일을 기념일로 정한 이유에 대하여는 대개 근대에 있어서 순국한 이들로 말하면 우리의 국망을 전후하여 그 수가 많고 또 그들은 망하게 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혹은 망한 국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비분 또는 용감히 싸우다가 순국하였으므로 국가가 망하던 때의 일을 기념일로 정하였으니 우리나라가 망한 것으로 말하면 경술년 8월 29일의 합방발표는 그 형해만 남았던 국가의 종국을 고하였을 뿐이요. 그 실(實)은 을사년 보호5조약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운명이 결정된 것이므로 그 실질적 망국조약이 늑결되던 11월 17일을「순국선열기념일」로 정한 것임.

11월17일을 택한 이유를 을사늑약으로 이에 저항하여 순국한 분들이 많았고, 이 늑약이 실제적으로 망국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들었다. 국치(망국)는 1910년 8월 29일의 병탄조약이지만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제에 빼앗긴 것이다.

국가간에 체결하는 조약(treaty)은 엄격한 원칙이 따른다. 강제성이 없는 당사국간의 교섭으로 시작하여 서명ㆍ조인ㆍ비준서의 교환 또는 기탁ㆍ등록의 절차를 거쳐 효력이 발생한다. 조약의 서명자는 국가의 최고통치권자이거나 그의 위임을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또 최고통치권자의 조인이 있어야 하고 현대 국가들은 국회의 비준을 필수 절차로 한다. 그런데 을사늑약은 이같은 기본원칙이 하나로 지켜지지 않았다.

첫째.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하고 무장군인들이 회의장까지 난입하여 광무황제를 겁박했다. 둘째. 이토의 지시로 외부대신의 관인을 훔쳐 조약문에 찍었다. 훔친 자는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이다.

셋째. 위임절차가 없었다. 박제순은 황제를 대리하는 대표가 될 수 없었고, 일본측 하야시역시 일왕의 위임장을 갖지 않았다.

넷째. 조약에 명칭이 붙지 않았다. 모든 조약은 원칙적으로 내용을 압축하는 명칭이 붙는다. 이 조약에는 강제로 조인하는 과정에서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을사늑약의 불법성은 당시 국제사회에서도 지적했다. 프랑스의〈국제공법〉이란 학술지는 1906년 2월호에서 공법학자 프랑시스 레이의 논문〈대한제국의 국제법 지위〉에서 을사늑약의 불법ㆍ무효성을 명쾌하게 지적하였다.

미국의 국제법학회는 1935년 각국의 조약법에 관해 정리 공포하면서 레이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1963년 유엔의 국제법위원회는 “국가대표에게 가한 개인적 강압”으로 체결된 국제조약의 사례 4개 중 하나로 을사늑약을 예시하였다.

조약의 명칭도 없고, 위임받지도 않은 대리인에 의해, 도둑질한 관인을 찍고 그리고 최고통치권자가 조인하지 않는 을사늑약은 하나의 괴문서일 뿐이다. 이렇게 위작된 문서에 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대한제국의 병탄으로 가는 괴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을사늑약은 1905년 11월 18일 밤 2시 30분경에 박제순과 하야시의 이름으로 ‘체결’되었지만 11월 17일자로 명시함으로써 17일이 ‘을사늑약일’이 되었다. 이에 의열사ㆍ의병이 봉기하여 일제와 싸우다 순국하신 분들을 기리고자 임시정부에서 순국기념일을 정한 것이다.

순국선열의 시범(示範)은 다음과 같다.

1. 나는 조국을 광복코저 이 몸을 바치노라.

1. 나는 겨레를 살리고저 이 생명을 바치노라.

1. 나는 국혼을 찾아서 세사를 잊었노라.

1. 나는 후사를 겨레에 맡기노라.

1. 나를 따라서 조국과 겨레를 수호하라.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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