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스포츠

문학과 스포츠

  • 기자명 오세영 교수
  • 입력 2022.09.29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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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 정신이 없는 육체만의 인간 혹은 육체가 없는 정신만의 인간이란 상상할 수 없다. 정신이 없는 육체를 시신, 육체가 없는 정신을 귀신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뿐 아니다. 건강한 정신 없이 건강한 육체가 있을 수 없고 건강한 육체 없이 건강한 정신이 있을 리 없다. 우리가 일상으로 하는 말이다.

그래서 옛부터 우리들은 완전한 인간의 전형을 완전한 정신과 완전한 육체의 결합에서 찾았다. 즉 정신과 육체가 바람직하게 조화를 이루고 문무를 온전하게 겸비한 자를 이상적 인간형으로 본 것이다. 우리들이 문학을 중시하고 스포츠를 생활화하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학은 정신의 식량, 스포츠는 육체의 자양분, 또는 문학은 정신의 스포츠, 스포츠는 육체의 문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과 스포츠는-비록 그 외양이 각자 다르게 표출된다고 하더라도-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첫째, 가상의 공간을 지향한다. 문학이 허구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한다면 스포츠 역시 우리에게 현실과 단절된 그들만의 어떤 별개의 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여준다. 문학적(허구적) 공간에서 전개되는 인물(주인공)들의 행위나 스포츠(묵계 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물(선수)들의 행위는 모두 현실이 아닌 기호적인 차원에서 벌어진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동이나 월드컵 경기장에서 뛰고 있는 박지성은 모두 일상현실이 아닌, 가상공간 속의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학이나 스포츠의 주인공들은 이 가상의 세계가 만들어낸 인위적 케릭터들이다. 그들은 일상과 단절된 그들만의 어떤 독립된 공간에서, 그들만이 지닌 룰과 정체성으로 행동한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끼리 약속한 어떤 가정의 체계를 통해 -비록 현실은 아니지만-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마치 현실적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문예학적 용어로 소위 ‘관습(convention)’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일상세계에서 어떤 사람이 주먹을 휘둘러 상대방을 죽게 했다면 중대한 살인범죄에 해당하고 행위자는 당연히 그에 합당한 징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복싱 경기장의 링 위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사정이 전혀 다르다. 어디까지나 경기 중에 일어난 돌발적 변수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합의 룰을 범하지 않는 한 그는 비록 그의 주먹이 상대의 목숨을 앗았다 하더라도 현실법상 처벌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둘째, 문학에 있어서 스토리와 스포츠에 있어서의 경기 내용은 그 전개 방식이 유사하다. 그것은 아마 크게 두 가지 원리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 내용이 양자 모두 두 세력의 갈등에 얽힌 이야기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내용 전개의 핵심을 이루는 요체가 사건의 반전(reverse)에 있다는 점이다.

모든 문학작품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서로 상반하는 두 가치 즉 긍정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주동과 부정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반동 간의 상호 갈등과 그 화해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는 스포츠에 있어서 우리 팀과 상대 팀의 싸움으로 설명될 수 있다. 구기 종목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한편 문학에 있어서 풀롯 구성은 대체로 사건의 발단, 갈등 그리고 그로 인해 야기되는 주인공의 운명이 예기치 않게 반전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스포츠 경기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 지고 있는 팀이 게임의 막판에 갑자기 다수의 골들을 득점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은 이같은 반전의 대표적인 예의 하나가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공감하는 것처럼 대체로 우리가 훌륭한 경기라고 치부하는 것은 대개 경기 내내 패배로 몰리던 팀이 경기 종료 직전에 돌연 실점을 만회하거나 예상 밖으로 한 골을 더 넣어 극적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경우이다.

셋째, 문학작품은 여러 장르로 뉘어진다. 시는 일인칭 자기고백체, 소설은 3인칭 서사체, 드라마는 이인칭 대화체 양식으로 되어 있다. 스포츠 역시 육상종목, 구기 종목, 격투기 등이 있으며 그들 상호 간의 유사성은 문학을 구성하는 장르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체조나 피겨 스케이팅과 같은 단독 연출과 축구나 야구 같은 팀워크 연출이다. 필자의 상상력으로 말하자면 스포츠의 체조나 피켜스케이팅 같은 것들은 문학의 시에, 축구나 야구같은 경기는 문학의 소설에 해당한다. 이렇듯 허구의 공간에서 연출하는 유희도 실은 나름대로 동일한 원리의 양식적 통제를 받으며 거기에는 어떤 보편적 자율성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피켜스케이팅이나 체조의 경기자는 시의 화자와 별다름이 없다. 시에 있어서의 화자의 독백은 피겨스케이팅이나 체조 경기자의 몸짓에 해당한다. 그렇지 않던가. 피켜스케이팅이나 체조의 경기자는 시의 화자가 자신의 독백을 여러 가지 언어적 수사법과 미학적 장치로 아름답게 형상화하는 것과 똑같이 자신의 몸으로써 화려한 미학적 연기를 펼쳐 관중들을 감동시킨다. 그러한 관점에서 김연아 같은 피겨스케이팅 선수는 지면 대신 빙판에서 언어 대신 몸으로 자신을 표현한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축구나 야구같은 팀워크 플레이는 분명 소설적이다. 일반적으로 소설에는 다수의 인물들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축구나 야구 역시 복수의 선수들이 등장하고, 전자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주동과 반동으로 나뉘어지듯 후자도 상호 대결하는 우리 팀과 상대팀으로 나뉘어지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피겨스케이팅이나 체조의 여성적 취향과 시가 지닌 여성성, 그리고 축구나 야구가 지닌 남성적 취향과 소설의 남성성 역시 분명 같은 맥락에 서 있다고 할 것이다.

넷째, 기능적 측면에서 문학이 독자에게, 스포츠가 관전자에게 주는 효과는 의외로 일치한다. 문학작품은 그 자신이 유발한 어떤 특정한 감정을 통해서 독자들이 지닌 불순한 내부 감정들을 배설시킨다. 스포츠의 경우 또한 다르지 않다. 문학의 독자들이 문학작품에서 얻은 감동으로 자신의 억압된 감정을 해소하고 정신적 자유를 획득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듯이 스포츠 애호가들 역시 경기 관전에서 경험한 감정적 희열과 충격을 통해서 새로운 자아를 확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포츠 관전이 대중의 스트레스를 해소시킨다고 할 때의 의미도 아마 이 같은 효과를 지적한 말일 것이다. 심리학적 용어를 빌릴 경우, 한마디로 카타르시스라 부를 만한 자아의 방위 기제(defense mechanism)라 할 수 있다.

오세영(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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