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인간이다

언어가 인간이다

  • 기자명 오세영 교수
  • 입력 2022.09.15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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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인간이다. 고래로부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정답은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동물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직립 보행할 수도, 불을 사용할 수도, 유희를 즐길 수도, 도구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인간에게서 언어만큼 확실하게 인간다움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는 다른 속성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고, 자라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언어 기능의 질적 향상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자신들의 모국어 교육을 빼놓은 국민교육이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학의 학제에서 그 어떤 응용과학들 보다 순수과학을, 순수과학 중에서도 인문과학을, 그 인문과학 중에서도 어문학을 첫째로 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세계의 모든 대학들이 그러하다. 그래서 그들이 개설한 학과의 서열은 학과명의 알파벳 순서가 아니라 인문대학으로부터 시작해서 문학, 역사, 철학 등과 같은 순서로 배정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통속적으로 우리는 언어를 단지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는 도구(기호)’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일상생활어의 경우에 대해서는 대체로 옳은 견해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즉 대한민국의 교육부는 이같이 소박한 언어관을 토대로 일선 중고등학교 국어교육의 학습 목표를-다른 선진국가 국어교육과는 달리-‘말하기’, ‘쓰기’, ‘듣기’로 한정해 놓고 고등학교 국어 과목에서 문학을 아예 배제해 버린 우까지도 범한 지가 이미 오래다. 문학작품을 거의 싣지 않은 현행 우리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를 한번 살펴보라. 어디서 들은 서푼짜리 귀동냥인지는 모르겠으나 문학은 미술이나 음악과 같은 예술의 한 장르이니까 아예 국어가 아니라는 그들의 그릇된 생각이 그 같은 결과를 만들어 놓아버렸다. ‘예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같은 예술이라도 문학이 그 외의 예술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모르는, 아니 그 ‘다름’을 알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우리 교육부 사람들의 그 지적 만용이 칼을 쥐고 그렇게 결정해버렸으니 어찌하겠는가. 참으로 한심할 뿐이다.(그러나 국어교육은 필히 어떤 텍스트를 통해 이루어지고 그 최고의 텍스트란 문학작품 이외엔 다른 것이 없음으로 문학교육이 곧 국어교육이다. 국어교육이란 그저 명분상의 명칭일 뿐 실상은 문학교육이 바로 그 실체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구미의 모든 선진 국가들은 그들의 민족문학을 대표한 문학작품들의 사화집을 교과서로 사용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일선 중고등학교에서의 국어 학습은 그 같은 교육부의 지침에 따라 개개의 학생들이 장래 성인이 되어 어떻게 그 ‘말하기’, ‘듣기’, ‘쓰기’를 잘 구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령 일상생활에서 정연한 논리로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거나 올바르게 들을 수 있도록 언어능력을 향상시키는 기술, 예컨대 어떻게 하면 아나운서가 흠 없는 문장과 정확한 발음으로 뉴스를 분명히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국회의원이 대정부 질문이나 의사 진행에서 그럴듯한 달변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교수의 강의를 제대로 습득할 수 있을까를 가르치는 기술 등이다.

그러나 국어교육이란 그것만이 아니다. 다른 중요한 학습 목표는 따로 있다. 언어란 우리가 통속적으로 생각하고 있듯 단지 사상이나 감정 혹은 어떤 정보나 지식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데서 끝나는 도구나 기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다 본질적인 것은, 인간은 언어가 있음으로 사유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엄연한 사실이다. 언어학에서는 이를 좁은 의미의 ‘말’(parole)과 좁은 의미의 ‘언어’(langue)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경우 좁은 의미의 ‘말’이 전자에 해당된다면 좁은 의미의 ‘언어’는 후자에 해당되는 언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에 ‘아래 아 한글’이라는 앱(언어)이 깔려야 워드(사유)를 칠 수 있는 상황과도 유사한 것이다.

그러니 높은 수준의 언어적 차원에 도달하지 못한 인간은 높은 수준의 사고를 할 수 없고, 또 높은 수준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없다. 한마디로 높은 수준의 언어적 차원에 도달하지 못한 인간은 높은 수준의 인간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언어 교육의 보다 중요한 목적은 단지 ‘말하기’, ‘듣기’, ‘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사고력과 창조적인 상상력의 개발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 교육을 중시한다. 그래서 세상의 학문 중에서도 인문학이 그 중심에 있다 하고 그 인문학 가운데서도 언어문학이 핵을 이룬다고 말하는 것이다. 옛 성인께서도 인간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이 세상을 말씀(로고스)으로 지으셨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같은 인간의 언어 행위 가운데서도 가장 지고지순한 경지에 있는 것이 바로 문학이다. 문학이야말로 인간이 언어로 구사할 수 있는 최상, 최고의 차원에 있는 까닭이다. 공자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란 사유에 간특함이 없는 언어이다.’(‘논어’, 위정편), ‘대저 사람들은 시로써 뜻을 이룰 수 있고 시로써 사물을 알 수 있고, 시로서 무리를 지을 수 있고, 시로써 비판할 수 있고, 가까이는 부모를, 멀리서는 임금을 섬길 수 있으며, 새나 짐승이나 초목의 이름도 모두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이다’(‘논어’, 양화편).

그러므로 가치 있는 인간은 허투루 말하지 않는다. 아니 생각이 없는 말, 무지한 말, 속된 말, 거짓된 말, 말이 되지 않는 말, 선동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그 인간됨이 그렇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꼴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정치 현실, 우리 정치인들이 일상으로 해대는 그 막말의 수준은 어떤가. 요즘 정가에서는 지난 정권이 검찰 개혁을 명분 삼아 간신히 만들어 놓은 소위 그 ‘검수완박’이라는 법을 현 정권이 그 문장에서 사용된 ‘등’이라는 어휘의 해석을 빌미로 뒤집어 놓은 사건을 두고 정쟁이 한 창이다. 나는 물론 그 사건의 내막 혹은 진실을 잘 모른다. 그러나 표면으로 떠오른 쟁점 그 자체만이라도 놓고 보자. 여당이건 야당이건, 우리 정치인들이 그 동안 우리의 국어를 얼마나 소홀히 하고 무시해 왔던 것인가를. 인간을 인간되게 만드는 그 인문학의 중요성을 얼마나 천대했던 것인가를 ……

그렇다. 정치도 인문적 가치를 우선하는 정치가, 정치인도 인문정신을 제대로 갖춘 정치인이 기본적으로 참된 정치이며 참된 정치인이다. 사람이 우선이 아니다. 사람다운 사람, 그러니까 인문 정신을 갖춘 사람이 우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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