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인연’의 소중함을 생각합니다

추석, ‘인연’의 소중함을 생각합니다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2.09.07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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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는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언제 누구와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갈라지기도 하지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부모님과의 만남으로 비롯되고 여기서 가정이 이루어집니다.

학교에 가서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고 사회에 나와서는 직장동료ㆍ선후배들과 만납니다. 연인과 사귀고 배필을 만나면 결혼을 하지요.

사람이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첫 번째의 만남이 운명적이라면 벗이나 연인ㆍ스승 등은 자의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운명적인 만남과 자의적인 만남이 모두 소중하지만, 인간사의 갈림길은 자의적인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다고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다면 한 사람의 평범한 어부로 종생하였을 것이고, 남강 이승훈이 도산 안창호를 만나지 못하였다면 평범한 기업인의 삶을 살았을 지 모릅니다.

함석헌이 우찌무라 간조를 만나지 못하였다면 평범한 교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플라톤은 ‘인생3락’이란 글에서 소크라테스를 만나서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유능한 제자들을 가르치게 된 점을 축복으로 꼽았지요.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에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된 것을 생애의 즐거움으로 꼽은 것입니다.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은 인연을 주제로 합니다.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세(三世) 인연이 톱니바퀴처럼 물고 물리면서 윤회한다는 철학사상이지요. 인연에는 사적인 만남 즉 가족ㆍ벗ㆍ 스승이 있고, 공적인 만남 즉 역사ㆍ신앙ㆍ시대정신이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의 하나는 사적이거나 공적인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는 경우를 찾게 됩니다.

한국사회는 지금 전근대와 근대와 탈근대가 거의 동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일종의 과도기라 할 것입니다. 생활과 가치관이 함께 과도기적인 현상에서 뒤범벅이 되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혼율은 세계 최고의 수준이고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천륜이 무너지는 사건이 잦게 되었어요. 친구 간의 배신, 친족 간의 다툼은 다반사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도덕 부재의 세태가 되었어요. 특히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공의와 국가관을 저버리고 정파의식과 이해타산에 빠져들면서 세상이 갈수록 험난해지는 것 같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시가 있습니다. 어느 가수가 취입을 하고 유명한 화가가 화제(畵題)로 삼기도 했지요. 옷깃을 한번 스쳐도 전생에 삼천 번을 만난 인연이 있다는 불가의 연기설은 지나치다 하더라도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무수한 사람들과의 인연을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아니 되리라 생각합니다.

어느 날, 부처님이 ‘가시굴’ 산에서 정사(精舍)로 돌아오시다 길가에 떨어져 있는 묵은 종이를 보시고, 비구에게 그것이 어떤 종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비구는 아뢰었지요. “이것은 향을 쌌던 종이입니다. 향기가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다시 걸으시다가 이번에는 길가에 떨어져 있는 새끼줄을 보시고 그것을 줍게하여 그것은 어떤 새끼줄이냐고 물으셨답니다.

제자는 다시 여쭈었어요. “이것은 생선을 꿰었던 것 같습니다. 비린내가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에 말씀하셨답니다. “사람은 원래 깨끗한 마음을 갖고 태어나지만 많은 인연에 따라 죄와 복을 부르는 것이다. 어진 이를 가까이하면 곧 도덕과 의리가 높아가고 어리석은 이를 가까이 하면 곧 재앙과 죄업에 이르는 것이다. 저 종이는 향을 가까이해서 향기가 나고, 저 새끼줄은 썩은 물고기를 꿰어 비린내가 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사람은 다 조금씩 물들어 그것을 익히지마는 스스로 그렇게 되는 줄을 모를 뿐이다.” (‘법구경 쌍서품’)

사적인 인연을 가꾸고 유지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공적인 인연을 맺고 지키는 일도 중요합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망국기에 우리 애국지사들은 사적인 인연을 접어두고 조국독립이라는 대의와 시대정신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멸사봉공, 선공후사의 가치관이지요.

인간(人間)이란 결국 ‘사람과 사람의 사이’ 즉 ‘인간관계’를 말함이 아닐까요. 언제 어느 길목에서 누구를 만나느냐, 베드로처럼 성인을 만나면 구도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악한 자 곁에 있다가 날벼락을 맞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일회성의 나그네 길에서 좋은 길손을 만나는 일은 삶의 축복입니다. 모든 ‘만남’은 운명적이기도 하겠지만 선(善) 의지를 통한 사랑과 우정과 존경의 사적 인연을 소중히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역사와 신앙과 시대정신과의 만남을 함께 한다면 고해(苦海)와 같은 세상사와 나그네 길도 보다 아름답고 밝을 것입니다.

‘만남’을 생각할 때이면 생각나는 시가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던 어른입니다. 저는 그분의 평전도 썼지요.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 ‘그 사람을 가졌는가’ 중에서)

 

한 세상 살다보면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집니다. 그 중에는 좋은 인연도 있고 악연도 있게 마련이지요. 선연은 백합처럼 키우고 악연은 서둘러 멀리하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 추석에는 소중한 사람들과 더욱 도타운 인연을 넓히고 세상을 떠난 선대들과의 연고도 살피고, 그리고 역병과 재난에 고통을 겪는 이웃을 생각하면서 의미있는 중추가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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