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간토대지진, 재일동포 6661명학살 99주년

일본간토대지진, 재일동포 6661명학살 99주년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2.08.25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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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폴란드 아우슈비치 현관에 걸린 조지 산타야나의 경구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가닥은 99년 전인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지방에 일어난 대지진 당시 일본(관헌)이 재일동포 6661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내년이면 100주년이다.

간토지방에 일어난 대지진은 순식간에 시지오카, 야마나시로 파급되었다. 도시는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고 해안에는 해일이 몰아쳐 수많은 건물이 쓰러지고 수많은 사람이 부상했으며 엄청난 재산상의 피해를 보았다. 전신ㆍ전화ㆍ철도를 비롯하여 전기ㆍ가스ㆍ수도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문명시설이 파괴되었으며, 학교나 병원도 대부분 쓰러져 가히 생지옥이었다. 이런 와중에 일본 군부와 경찰은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각처에서 방화와 폭동을 일으키고 여성들을 강간하였으며 우물에 독약을 투입했다는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퍼뜨렸다. 대진재로 치안이 무너진 상태에서 폭동이 발생할 것을 우려한 일본 정부는 국민의 관심을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에게로 돌리게 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이다. 마치 로마의 대화재 당시 네로가 기독교인들에게 방화의 혐의를 씌우고 그들을 학살한 정황과 비슷하였다.

유언비어의 조작과 유포 경위부터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대지진이 발생한 직후인 9월 1일 오후 일본 경시청은 정부에 진재현장에 출병을 요청하고 계엄령을 서둘렀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내무대신 미르노 젠타로와 경시총감 아카이케는 늦은 밤 도쿄시내를 돌아보고 다음날 도쿄와 가나가와현 경찰서 및 경비대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지시했다. 이들은 ‘폭동’에 대한 별도의 전문을 만들어 내무성 정보국장 고토의 명의로 전국의 지방장관에게 타전했다.

이렇게 하여 일본의 경찰, 군부, 우익세력이 총동원되고 이른바 ‘자경단’을 조직하여 “조선인은 모조리 죽여라”는 구호 아래 대대적인 학살극을 벌였다. 일본 신문들은 유언비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보도하여 조선인 학살을 부채질하였다.

구체적 사례다. 호쿠소 철도회사는 조선 노동자 500여 명을 고용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57명은 역전 구일시에 합숙시키고 있었다. 9월 4일 아침 이들 57명을 경찰서에서 보호하기로 하고 소방대원의 인솔 아래 경찰서 앞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동원된 군중들이 나타나 여러 명을 죽였다.

홍전촌의 자등원에 사는 조선 노동자 13명을 나라시노에 수용하기 위하여 자경단을 따라 이치카와 분서를 지나 중산재 북쪽에 이르렀을 때 부근의 경계를 맡고 있던 촌민들에게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뒤에 온 3명은 신원보증서도 갖고 있었는데 이들까지도 무차별 살해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5일 저녁부터 6일 오전까지 불태워져 매장되었다.

다음은 구정호에서 일하던 나환산이란 사람의 목격담이다. “나는 86명의 조선 사람을 총과 칼로 마구 쏘고 베어 죽이는 것을 직접 보았다. 9월 2일 밤부터 3일 오전까지 구정호 경찰서 연무장에 수용된 조선인은 300여 명이었는데, 그날 오후 1시경 기병 1개 중대가 도착, 경찰서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다무라란 자가 조선인 3명을 불러내 총살하기 시작하였다. 다무라는 총소리를 듣고 일본인들이 놀랄지 모르니 칼로 죽이라고 명령, 군인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83명을 한꺼번에 죽였다. 이때 임신부도 한 명이 있었는데, 그 부인의 배를 가를 때 뱃속에서 영아가 나왔는데, 군인들은 우는 아이까지 칼로 찔러 죽였다. 시체들은 다음날 새벽 화물자동차에 싣고 어디론가 운반해 갔다.”

일본 정부에서는 당시 외국인이 조선인 학살장면을 목격하지 못하도록 외국인을 각 경찰서에 집합시켜 감시하고 외출을 금지했다. 그리고 그 주위에서 총을 쏘고 싸움을 하면서 “이 총성은 조선인의 총성이며 이 싸움은 조선인이 습격하는 소리”라고 기만하는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조선인이 폭행하거나 습격하고 있다고 허위 선전하였다.

조선총독은 9월 6일 각 신문에 지시하여 “조사해 본 결과 관동지방 조선인은 노동자 3000, 학생 3000, 합계 6000명 중 살해당한 자는 2명뿐”이라고 보도하도록 했다.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조선인 중 5분의 1이 관동지방에 있었으니 그 수가 3만 이상에 달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었다. 다수의 인명을 살육하면서 2인뿐이라고 발표한 것은 실로 수심의 궤변이 아닐 수 없다.(‘한국독립운동사’3). 

재일조선유학생회는 1924년 1월 대표 김건의 명의로 ‘도쿄진재 한인학살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 중 학살 내용의 일부를 발췌한다.

“하동 광장에 한인을 다수 포집하여 기천기백인을 한꺼번에 총으로 난사하고 병영 또는 경찰서 구내에 기백기십인을 집합시켜 살해하였다. 더구나 노상에서 보는 대로 병력 내지 경찰관이 총살한 것은 물론 보통의 살인수단이라고 할 수 없게 소위 자경단, 청년단 등은 ‘조선인’이라고 외쳐 부르는 한마디에 백이 응하여 낭(狼)과 범(虎)과 같이 동서남북에서 몰려와 1명의 동포를 수십인이 달라붙어 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쏘고 봉으로 때리고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그 위에 죽은 사람의 목을 끌고 다니면서 능욕하였다. 몸을 전신주에 묶고 처음 눈알을 도려내고 코를 찔러 그 애통한 광경을 충분히 구경한 후에 배를 찔러 죽였다. 동네 앞을 흐르는 것은 우리 동포의 선혈이고 이곳저곳에 흐트러진 것은 우리 동포의 시체이다. 우리 동포의 시체가 퇴적하여 우전천은 유통도 막혀 동포의 피가 썩는 그 악취는 통행인의 호흡이 막힐 정도였다.”

이 같은 만행을 저지르고도 일본은 지금까지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 과정에서도 언급없이 넘어갔다. 많이 늦었지만 9월 1일을 법정추모일로 정해서 100년 동안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을 달래고, 유엔이 정한 제노사이드 정신을 받들어 진상규명과 추모사업에 정부와 국회가 나섰으면 한다.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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