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의 진실과 사실의 진실

거짓의 진실과 사실의 진실

  • 기자명 오세영 교수
  • 입력 2022.08.04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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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남원 땅에 가면 ‘광한루(廣寒樓)’라는 누각이 있다. 유서 깊고, 아름답고,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우리 고전, ‘춘향전’의 배경이 된 곳이다. 그런데 광한루 뒤편 좀 외진 대나무 숲속엔 또 우아한 한 칸짜리 한옥 기와집 한 채가 서 있다. 이름하여 ‘춘향각’, 춘향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영정 앞에는 항상 불이 든 향로와 촛불이 준비되어 있으므로 찾는 이는 누구나 춘향에게 참배를 드린다. 그 춘향의 초상이 아름답다. 참으로 우리 민족을 대표할 만한 미인도의 하나다.

그런데 춘향의 이 영정은 춘향의 진짜 모습일까? 그럴 수 없다. 거짓이다. 그는 현실의 인물이 아닌 소설 속의 주인공, 설령 실존 인물이었다 하더라도 자화상이나 사진 그 아무 것도 후세에 남겨놓은 것이 없는 사람이니 어떻게 사실 그대로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혹자는 화가가 소설 속에 묘사된 춘향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머리 속에 떠 올려 그린 것이어서 사실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 속 춘향의 모습은 구체적이 아니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묘사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대명전 대들보에 명매기 걸음으로, 양지 마당에 씨 암탉 걸음으로, 백모래밭에 금자라 걸음으로 월태화용월(달같은 자태와 꽃 같은 얼굴) 고운 태도 완보로 건너갈 새……중략……청강에 노는 학이 설원에 비침 같고 단순호치(붉은 입술과 흰 이) 반개하니 별도 같고 옥도 같다. 연지를 품은 듯 자하상(붉은 빛의 치마) 고운 태도 어린 안개 석양에 비치운 듯 취군(푸른 치마)이 영롱하여 문채(문양과 꾸밈)는 은하수 물결 같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이 영정에 그려진 춘향의 모습을 사실로 여기고 참배하며 이 ‘거짓’된 춘향이를 통해서 나름으로 삶을 성찰한다. 그러니 거짓이라 해서 모두 무가치하다거나 사악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는 거짓 속에서도 무언가 가치를 발견하며 또 그 가치를 통해서 어떤 진실을 깨우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어렸을 적, 부모님으로부터도 많은 거짓말을 들으면서 자랐을 것이다.

한국전쟁시기였다. 배고프고 가난했던 우리들의 그 유년시절, 어머니는 외아들인 필자만큼은 어떻게 해서든지 점심 식사를 거르지 않도록 배려해 주셨다. 그러나 그때마다 당신은 자리를 피하셨고 나는 혼자서 밥을 먹어야 할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문득 생각이 나면 어머니께 점심을 같이 먹자고 조른 적이 있었는데 당신의 말씀이 늘 이랬다. ‘아가, 나는 할 일이 있어 미리 부엌에서 먹었으니 내 걱정은 말고 너나 많이 먹어라.’ 50을 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신 당신은 생전에 또 이런 말씀도 자주하셨다. ‘너는 앞으로 훌륭한 인물이 될 아이다. 내가 그 때까지 살지를 모르겠구나’.

나는 외가에서 자랐다. 그런데 귀한 손님이 들면 외할머니께서는 나를 항상 당신 곁에 조신히 앉히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어르신, 이 아이를 좀 보세요, 보통애가 아니랍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이지요’. 그러면 손님은 또 이렇게 맞장구를 치시는 것이었다. ‘아무렴요. 앞으로 큰 인물이 될 비범한 아이지요. 어떻게 다른 아이들과 비교할 수 있나요?’

그러나 다 거짓말이었다. 후에 알고 보니 어머니는 항상 남몰래 숨어 점심을 굶으셨고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애비 없는 천애의 무녀독남 유복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때 그 거짓말을 참말로 믿었던 까닭에, 당신들이 비범하다는 내가 비범한 인물이 되지 않으면 그 곧 내가 아니라는 일념으로, 각고분발하여 —비록 훌륭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나마 한 생애를 대과 없이 이처럼 살아냈다. 거짓속에 진실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과 진실은 무슨 관계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은 진실이 아니다. ‘사실’이란 인식 대상이 객관적으로 드러낸 양태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진실’은 어떤 가치가 그 대상에 내재하여 그로써 우리네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실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실에 토대한 객관적 진실이요. 다른 하나는 거짓에 토대한 주관적 진실이다. 우리는 전자를 본질로 하는 정신활동을 과학(학문), 후자를 본질로 하는 정신활동을 문학(예술과 종교를 포함한 넓은 의미)이라 이른다. 따라서 우리가 통상적으로 ‘거짓’이라 하는 것은 ‘사실의 반대말’이 아니라 ‘진실의 반대말’인 것이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을 보면 그 첫머리에 5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주인공 장 발장이 자신에게 따뜻한 음식과 숙박을 제공해준 마리엘 주교의 은식기를 훔쳐 도망을 치다가 자벨 경사에게 붙잡혀 다시 감옥에 수감 될 처지에 빠지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경찰서에 증인으로 출석한 마리엘 신부는 오히려 그 은식기는 자신이 선물로 준 것이지 장발장이 훔친 것은 절대 아니라고 거짓 증언을 해줌으로써 그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에 감동을 받은 장 발장이 과거의 삶을 버리고 새 사람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은 독자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마리엘 신부의 거짓말 한마디가 비천한 집안의 한 속된 좀도둑을 이처럼 아름다운 성자로 변신시키게 만드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한 인간의 삶에서 이보다 더 값진 진실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벨 경사가 추구한 그 ‘법’이라는, 사실적 진실보다 마리엘 신부가 실천한 그 거짓된 진실이 훨씬 더 위대하지 않은가.

지난 정권 시절, 국회의 한 대정부 질의에서였다. 당시 야당 의원들은 법무부 장관에게 그의 아들이 군 복무 중 출장을 가서 기한 내 복귀하지 않은 사건을 두고 이를 탈영이라고 지탄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장관은 그 추궁이 못마땅했던지 야당 국회의원들을 향해서 이렇게 비아냥거렸다. ‘소설을 쓰시네’, 물론 이 말은 예상 밖의 역풍을 몰아와 엉뚱하게 정치와 아무 상관이 없는 문단에서 빈축을 샀던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다, 소설가들을 한낱 거짓말장이로 몰아부쳤으니 말이다. 그러나 필자가 앞서 누누이 언급한 것처럼 소설이 어찌 항상 거짓말로 끝나는 이야기인가. 오히려 소설이야말로 거짓으로 쓰는 진실이 아니던가. 그러니 장관은 역설적으로 그 야당의 주장이 사실은 아니지만 진실일 수도 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 꼴이 되어버렸다.

오세영(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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