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진보

보수와 진보

  • 기자명 오세영 교수
  • 입력 2022.07.07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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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에게는 알게 모르게 보수는 과거 퇴행적, 진보는 미래 발전적이라는 편견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보수적이라고 하면 무사 안일을 추구하는 어떤 속된 인간으로 취급하는 듯싶어 기분이 좀 나빠지고, 반대로 진보적이라 하면 무언가 깨우치고 선도적인 사람으로 알아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 우리의 일부 젊은이들이 보수의 전형으로 소위 ‘꼰대’ 라는 인간형을 드는 것 역시 같은 속내를 드러낸 말일 것이다.

피상적인 우리네의 언어적 감수성으로는 아마 그럴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령 어떤 국어 사전(이희승 편 『국어 대사전』)의 뜻 풀이를 보아도 보수란 ‘재래의 풍습, 습관과 전통을 중요시하여 그것을 그대로 지키는 행위’, 진보란 ‘사물이 점차 발달하는 일’로 정의되어 있어 언뜻 진보는 무언가 사물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어떤 가치 지향적 행위인데 보수는 이를 저해하는 반동적 현상인 것처럼 기술해 놓고 있지 않던가.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일까. 보수나 진보는 ‘과거’ 혹은 ‘미래’와 같은 시간관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특정한 이념을 뜻하는 용어도 아니다.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좌파를 진보,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우파를 진보라 하지 않던가. 이는 단지 삶의 완전성을 지향코자 하는 인생의 두 가지 측면, 즉 ‘현실’을 추구하는 가치관과 ‘이상’을 추구하는 가치관을 각각 일컫는 말 이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그 어떤 가치 평가가 있을 수 없다. 가치 중립적이다.

더군다나 진보는 항상 미래 지향적이지 않다. 그 추구하는 바 이상이 과거적인 데 있다면 그 ‘과거적인 것’에의 지향 역시 진보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령 춘추전국 시대의 난세를 요순(堯舜)의 성왕정치(聖王政治)로 극복코자 했던 공자의 왕도사상(王道思想)은 비록 과거 지향적이었다 할지라도 당시로서는 진보적이었으며, 서구의 르네상스 또한 —그리스 고전의 재발견이라는 점에서— 과거적인 것으로부터 깨우침을 얻었지만 중세에 대해서는 진보적이었다. 즉 사물의 발전이란 과거적인 것의 전통이나 가치를 재발견 혹은 선양하는 데서 오히려 완전을 기할 수도 있다.

이는 문화 예술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예컨대 문학사에서는, 세계 문예사조는 일반적으로 ‘낭만적인 것’과 ‘고전적인 것’의 상호 교차 반복으로 전개된다는 인식이 확립되어 있다. 그 어느 시대나 새롭게 등장한 사조(진보적 사조)란 실상 그 처한 현실을 과거적 원리를 통해(계승 발전시켜) 극복한다는 주장이다. 가령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에 대해 진보적이었으나 그 이상은 중세적 세계관에서 찾았고 사실주의는 낭만주의에 대해 진보적이었으나 그 토대를 낭만주의보다 더 과거적인 고전주의에 두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오늘날 이 시대의 가장 전위적이고도 실험적인 사조라고 믿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떨까. 물론 리얼리즘에 반동하는 문예사조라는 점에서는 진보적이다. 그러나 이 역시 전 시대의 낭만적 세계관이 새롭게 포장되어 나타났다는 점에서는 과거 지향적이 아닌가. 그 같은 관점에서는 ‘보수’가 ‘진보’보다 오히려 탈과거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누가, 진보는 탈과거적이어서 가치를 전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보수는 과거 지향적이어서 가치를 전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생각이다.

물론 예술이란 기본적으로 창조를 최선의 가치로 여긴다. 모든 예술은 새로운 것의 창조에 그 본질이 있다, 따라서 그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부단히 자신이 주거하는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것은 마치 알에서 부화한 어린 새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와 홀로 푸른 하늘을 향해서 나래를 치듯 끊임없이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어떤 미지의 세계로 비상을 꿈꾸는 행위와 다름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본질적으로 현실보다는 이상을 추구하는 자리이다. 그 어느 시대든 보편적으로 예술가들이 보수를 기피하고 진보를 지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앙드레 지드가, 사르트르가, 혹은 대부분의 아방가르드 시인들이 이미 그 실패가 필연으로 보이는 마르크스주의 정치 체제를 굳이 옹호하면서 그들 스스로 진보적 좌파라고 공언하지 않았던가. 조금 관심을 갖고 성찰해보면 과거나 현재나 우리가 직면했던 문화 예술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제 암흑기, 해방의 혼란기, 권위주의 군부 시절과 이의 유산을 물려받은 오늘의 우리가 또한 모두 그러하다.

이상을 지향하는 가치관을 진보라고 할 경우, 그 지닌 바 덕목은 물론 현실의 모순이나 한계를 극복 혹은 혁파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항상 부정적이고 이상이 항상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현실이 항상 가치 있고 이상이 또한 항상 무가치한 것도 아니다. 인간은 현실과 이상이라는 두 가지 가치에 몸을 기대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머리로는 하늘(이상)을 바라보지만 발은 항상 지상(현실)을 딛고 산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상은 수만 년의 삶을 영위해온 인류의 유산 혹은 전통에 대한 통렬한 성찰 없이, —그러니까 이들과 무관하게— 돌발적인 꿈이나 환상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현실을 무시한 이상은 사상누각이고 이상을 무시한 현실은 퇴락한 폐가(廢家)일 따름이다. 20세기를 피로 물들인 볼셰비키 혁명을 보라.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에의 집착은 그 자체가 바로 재앙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진보는 —보수 홀로 가치 있는 게 아닌 것과 같이— 그것만으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보(이상)를 전제하지 않은 보수(현실)가 건강을 유지할 수 없는 것처럼 보수(현실)를 전제하지 않은 진보(이상)는 백일몽일 수밖에 없다.

오세영(시인·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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