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냐 사도냐’ 백범의 길, 다시 찾는다

‘정도냐 사도냐’ 백범의 길, 다시 찾는다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2.06.23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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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과 해방정국에서 백범 김구선생의 족적을 지우면 스토리가 진행되지 않는다. 그의 존재로 인해 우리는 독립운동사에서 자존을 찾고 분단사에서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어느 정도 현실에 타협하면서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아들의 편지를 받고 다음과 같이 썼다. “천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는데, 옳고 그름의 기준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에 관한 기준이다. 이 두 가지에서 네 단계의 큰 평등이 나온다. 옳음을 고수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단계이고, 둘째는 옳음을 고수하고도 해를 입는 경우이고, 세 번째는 그름을 추종하고도 이익을 얻음이요, 마지막 가장 낮은 단계는 그름을 추종하고 해를 보는 경우다.”

백범은 굴곡진 현대사에서 항상 시대가치를 찾고 정도를 택하였다. 유교의 타락에 대응하여 동학에 들어가서 소년접주가 되고, 일제의 침략에 맞서 의병이 되고, 명성황후 살해에 분개하여 일본밀정 스치다를 죽이고, 국민 계몽운동과 학교를 세우고, 공화주의 신민회에 들어가고, 안악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탈옥 후 중국에 망명하여 27년 동안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해방 후 환국하여 반 분단 통일 정부 수립에 정진하던 1949년 6월 26일 이승만 수족인 88구락부의 음모로 암살되었다.

백범의 생애에 일관되게 흐르는 ‘수맥’은 ‘정도론(正道論)’이다. 백범은 철저하게 사도(邪道)를 배격하고 정도를 택하였다. 그가 겪은 시대는 고난과 격동의 연속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평탄한 길도 있었고, 안일한 길도 있었다. 현실 노선도 있었고 비현실 노선도 있었다. 타협 노선도 있었고 침묵의 길도 있었다.

그때마다 백범은 망설이지 않고 정도를 택하고 그 길을 걸었다. 그 길이 비록 비현실적이고 고난의 길이라 해도 마다하지 않았다. 70 평생에 걸쳐 왕조시대, 망국, 독립운동, 임시정부, 해방, 분단, 신탁통치, 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험난한 도정에서, 그는 한 번도 민족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도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정도에서 비껴가지 않았다. 말이 쉽지 험난한 역사의 고빗길에서 올곧은 의지와 신념 없이는 결행이 어려운 길이었다.

민족적인 운명과 개인적인 운명을 분리시키지 않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또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 백범이다. 흔히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선공후사(先公後私)를 내세우고 멸사봉공(滅私奉公)을 다짐하지만 사심(私心)과 공심(公心)이 뒤바뀌는 경우를 자주 지켜보게 된다. 사심이 앞을 가려 공심의 눈을 멀게 만드는 것이다. 사회지도층 인사 중에는 초심(初心)은 좋아 보였는데 종심(終心)은 형편없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백범은 상민 출신으로 입신하여 임시정부의 주석이 된 후에도 초심과 종심이 다르지 않았고, 사심과 공심이 뒤섞이지 않는 일관된 삶을 살았다. 세계식민지 역사상 가장 악독한 일제와의 투쟁에서 한 번도 한눈을 팔거나 사욕을 취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민족해방과 통일조국 건설이라는 대의와 정도를 당당하게 걸었다.

우리는 해방 후 백범의 행적에서도 초심과 정도의 순결성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에게 신탁통치와 분단정부는 사도일 수밖에 없었다. 그 길이 비록 현실적이라 해도 민족사의 사도인 분단을 백범은 수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시점에 분단이라는 현실추종론자들에게 “정도냐 사도냐”의 논리를 거침 없이 제기하였다. 백범의 초심과 종심의 중심이 이랬다.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보다 그 길이 정도냐 사도냐를 더 소중히 여기고 그대로 행동했던 백범의 사상은, 민족 해방전쟁을 지도한 혁명가이면서 ‘문화국가론’을 제시한 선구자의 길이기도 하다.

이승만과 그의 수하들에게 정계를 은퇴한 노혁명가의 존재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임시정부에서 탄핵을 당한 이승만대통령은 백범에게 무진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해방 후 김구ㆍ김규식ㆍ여운형 등의 남북협상과 통일정부 수립론에 비해서 자신의 단독정부론이 명분에서도 밀린다는 점을 알았다. 그래서 백범에 대한 심한 콤플렉스와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 독선과 아집이 강한 이승만은 김구와의 공존이나 정권교체는 안중에 없었다. 처음부터 그는 장기집권을 구상하고, 여기 저해되는 인물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제거했다.

이승만의 수하에는 일제에 충성하고 일제 패망으로 한때 숨을 죽이고 있다가 그가 집권하면서 다시 요직을 차지한 충성파들이 우글거렸다. 이들은 하나같이 이승만의 충복이면서 김구에는 적의를 품고 있었다. 그 충복들의 수뇌가 거개 8ㆍ8구락부의 멤버들인데, 이들은 조선총독부 시절과 미군정 시기에 거느렸던 막강한 인맥ㆍ조직ㆍ정보ㆍ자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비밀조직 88구락부는 국방장관 신성모,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포병사령관 장은산, 특무대장 김창룡, 서울시경국장 김태선, 정치브러커 김지웅이 핵심이고 여기에 헌병사령관 전봉덕, 친일경찰 노덕술ㆍ최운하 그리고 서북청년단과 그 출신으로서 하수인으로 낙점된 안두희였다. 안두희는 주한미군 CIC정보원으로 활동하다 요원이 된 인물이다.

이승만의 주변에는 주로 이런 인물들이 포진하고, 이들은 주군(主君)의 심기와 심중을 귀신같이 꿰면서 먹잇감을 찾았다. 당시 이승만의 심기를 가장 불편하게 만든 것은 반민특위였다. 헌법 규정에 따라 특별법이 제정되고 특위가 구성되어, 정부와 군경에 똬리를 튼 자신의 수족들이 하나씩 체포되자 이승만은 정치적 위기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회한 책략가였다. 또 국민의 시선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경찰, 헌병대 등 공안팀을 동원하여 먼저 국회의 진보적민족주의 인물들을 쳐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이다. 국회의원들이 불안ㆍ공포에 떨고 있을 때 6월 6일에는 경찰을 동원하여 활동 중인 반민특위를 짓밟고 요원들을 체포했다. 그리고 6월 26일 백범을 암살했다. 암살사건 후 제2차 국회의원 구속사건이 벌어졌다. 정권수뇌부는 1차국회프락치사건→반민특위해체→김구암살→2차국회프락치사건으로 이어지는 정교한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극히 잘 짜인 각본이었다. 백범 서거 73주년인 지금 ‘정도냐 사도냐’는 여전히 시대가치가 되고 있다.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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