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가부 폐지에 앞서 ‘근우회’ 알았으면

여가부 폐지에 앞서 ‘근우회’ 알았으면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2.04.13 17:07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윤석열후보의 일곱 글자 공약이 대선판에 이어 인수위의 핵심 키워드가 되었다. 우리 정치의 후진성 또는 저급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국민의 절반이 여성이고, 정부에 성평등 정책 전담기구가 있는 나라는 194개, 독립부처 형태로 있는 나라는 160개인데 마치 한국에만 여성가족부가 있는 것처럼 호도한다.
여가부의 올해 예산은 1조 4560억원으로 정부 전체 예산의 0.24%에 불과하며 18개 정부부처 중 가장 적다. 그나마 타 부처의 용도에 많이 쓰이고 순수하게 ‘여성과 가족’을 위한 예산은 소액에 불과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약헌)에서부터 남녀평등, 여성참정권을 보장한다고 명시하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를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렀다. 하지만 실제로 여권신장을 위한 제도화는 2001년 1월 김대중 정부가 처음으로 여성부를 독립 부처로 출범하여 여성정책 수립과 총괄, 남녀차별금지, 여성인력강화 등의 업무를 맡게 되었다. 당시는 1국 3실 정원 102명의 작은 규모였다. 여성부는 국민의 성평등 의식의 향상과 함께 업무가 늘어나면서 노무현정부에서 여성가족부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명박 정부가 다시 여성부, 박근혜 정부에서 여성가족부로 환원되는 등 곡절을 겪었다. 
미군정기 보건후생부 부녀국으로 시작된 여성관련 정부기구는 이승만정부의 사회부 부녀국, 박정희정부의 보사부 부녀 아동국, 전두환정부의 보사부 가정복지국, 노태우정부의 제2정무장관실, 김영삼정부의 제2정무장관실 등의 ‘셋방살이’ 신세를 겪은 끝에 김대중정부에서 비로소 여성부가 신설되었다. 그리고 다시 몇 차례 존폐의 기로와 명칭 변경 과정을 겪고 지금 다시 ‘최후의 기로’에 직면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인수위 쪽이 오는 9월 정기국회에서 정부조직법을 개정하여 처리한다는 쪽으로 한발 물러난 것이다. 
국정과제가 산적해 있는 시점에 인수위가 현안을 제쳐두고 ‘대통령집무실이전’과 ‘여가부 폐지’를 들고나온 것 자체가 적절치 못한 처사였다. 이참에 여성운동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근우회’를 통해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험난했던 과정을 살피고자 한다. 
3.1혁명 이후 몇 갈래로 추진되던 여성단체들은 1927년 4월 26일 서울에서 근우회(槿友會) 창립을 위해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발기인은 강정순ㆍ주세죽ㆍ허정숙ㆍ황신덕ㆍ차미리사ㆍ김활란ㆍ김은도ㆍ김일엽ㆍ김순복ㆍ유각경ㆍ길정희ㆍ정칠성ㆍ조원숙ㆍ최은희 등이다. 사회운동가ㆍ여의사ㆍ교원ㆍ기자ㆍ종교인ㆍ문인ㆍ실업인 등 각계에서 활동한 15명을 발기인으로 선정하고 5월 27일 서울 YMCA 강당에서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발기인 대회를 마친 근우회는 더욱 회원을 확충하여 6월 17일 창립총회를 갖고 공식출범하였다. 창립총회는 ‘1. 조선 여자의 공고한 단결을 기함’, ‘2.조선 여자의 지위향상을 기함’이라는 강령을 채택하고 지도부를 선출했다. 회장은 김활란, 부회장 유각경, 서기 유영준ㆍ최은희ㆍ차사백, 사찰 이덕요ㆍ주세죽ㆍ현덕신ㆍ강정희ㆍ임순분 등이다.
창립총회는 근우회 강령과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강령을 보면 1)여성에 대한 사회적ㆍ법률적 일체 차별 철폐, 2) 일체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3) 조혼 폐지 및 결혼의 자유, 4) 인신 매매, 공창 폐지, 5) 농촌 부인의 경제적 이익 옹호, 6) 부인 노동의 임금 차별 철폐 및 산전ㆍ산후 임금 지불, 7) 부인 및 소년공의 위험 노동과 야업 철폐 등이다. 
선언문은 이렇다. 
우리 조선 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조선 여성의 모든 특수성을 고려하여 여성 따로의 전체적 기관을 가지게 되었나니(……) 조선 여성의 성숙 정도에 의하여 바야흐로 중대한 계단으로 진전하였다.  
부분적으로 분류되어 있던 운동이 전선적 협동 전선으로 조직된다. 여성의 각층에 공동되는 당면의 운동 목표가 발견되고, 운동 방침이 결정된다. 그리하여 운동은 비로소 광범하게 또 유력하게 진전될 수 있게 되었다. 이 단계에 있어서 모든 분열 정신을 극복하고 우리의 협동 정신으로 하여금 더욱 공고하게 하는 것이 조선 여성의 의무이다.(…)
근우회는 이러한 견지에서 사업을 전개하려는 것을 선언하나니. 우리의 앞길이 여하히 험악할지라도 우리는 일천만 자매의 힘으로써 우리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 여자는 벌써 약자가 아니다. 여성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할 것이다.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자.
애국부인회와 더불어 우리나라 근대여성운동 단체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근우회는 창립을 선언하면서 운동 목표를 1)선전ㆍ조직, 2)기관지 발행, 3)‘여자의 날’ 제정, 4)무산 여성의 직업활동 추진, 5)교양 사업, 6)여자의 생활태도, 7)인신매매 폐지 등을 제시했다.
근우회는 사업추진을 위해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으로 김활란ㆍ유명순ㆍ차사백ㆍ이현경ㆍ이덕요ㆍ황신덕ㆍ김선ㆍ유각경ㆍ박신우ㆍ정칠성ㆍ조원숙ㆍ현덕신ㆍ박원희ㆍ최은희ㆍ방신영ㆍ홍애시덕을 선출하였다. 당시 대표적인 여성활동가들이다. 근우회는 창립대회를 마치고 시위행진을 시도했으나 일제경찰의 제지로 실행하지는 못하고 실내에서 농성을 벌였다.
근우회는 본부를 서울에 두고 전국 각지와 만주ㆍ일본에는 별도의 지부를 설치했다. 회원은 만 18세 이상의 여성으로 근우회의 강령과 규약에 찬동하며, 회원 2인 이상의 추천을 받아 입회할 수 있도록 하고, 회원은 입회금 1원과 매월 20전 이상의 회비를 내도록 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근우회는 크게 확장되어 1929년 5월 현재 총 40여 개 지회가 결성되고, 회원은 2971명, 직업별 구성을 보면 가정 부인 1256명, 직업여성 339명, 학생 194명, 미혼여성 181명, 노동여성 131명, 농촌여성 34명이었다. 근우회는 지회가 늘어나고 조직이 확대되면서 사회활동을 강화하였다. 
근우회는 1920년대 독립운동의 침체기에 더욱이 여성차별의 봉건적 유제가 여전한 시기에 큰 역할을 하였다. 궁극적인 목표는 독립운동이었지만 이 목표에 이르기 위한 과정으로 여성 계몽운동, 여성차별철폐 운동, 독립사상 고취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독서회ㆍ토론회ㆍ강연회 등을 자주 열었다. 
근우회는 이런 활동을 전개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특히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기독교여자청년회와 함께 1930년 1월 15일 서울 시내 10여 개 여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전개하도록 그 계획과 실행을 지도하였다.

김삼웅(논설고문)

저작권자 © 데일리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