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개관하다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개관하다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2.04.07 09:42
  • 수정 2022.04.07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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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수립 103년만인 지난 삼일절에
서울 서대문형무소 건너편에 문열어
27년 동안 항일민족해방투쟁 지휘한
‘대한민국의 뿌리’ 중요한 사료 전시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지난 3월 1일 해방 77주년,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3년 만에 개관하였다. 대통령선거와 코로나19 확산으로 사회가 어수선할 때 개관하여 일반 국민에게는 비교적 덜 알려진 상태이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구 서대문구 구의회 건물 터이고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건너편에 세워진 기념관은 2020년 4월에 착공하여 2년여 만에 준공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과정과 임정요인들의 활동상, 대일항쟁의 자료, 올해 90주년이기도 하는 한인애국단의 투쟁사 등이 사료를 중심으로 진열되었다. 
임시정부기념관은 중일전쟁으로 상하이에서 중국의 여러 도시로 이전하게 된 배경과 일제의 패망으로 환국하게 된 요인들의 모습 등을 상세히 전시하고 설명을 깃들인다. 당시 헌법에 세계에서 두 번째인 여성의 참정권 보장과 여성 의정원의원 6인의 명단 등 우리 임시정부의 빼어난 기록을 접할 수 있다. 이 기회에 대한민국의 뿌리인 임시정부 초기 모습을 복기한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1919년 4월 11일이다. 일제로부터 국토와 주권, 국민을 완전히 되찾아 ‘정식’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임시’로 세운 정부였다. 상하이에서는 국내외에서 모여든 조선의 각도 대표 29인이 4월 10~11일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여기서 임시헌장 10개조와 정부 관제를 채택,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비록 망명정부일망정 유사 이래 처음으로 민주공화제 정치체제를 채택한 것이다. 
임시헌장의 10개 조항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제1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제2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ㆍ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 평등으로 함”(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ㆍ언론ㆍ저작ㆍ출판ㆍ결사ㆍ집회ㆍ주소이전ㆍ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제4조) 등 근대적 민주공화제의 헌법 내용을 담았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최고 수반인 국무총리 선출을 둘러싸고 심한 논란이 일었다. 내정된 국무총리 후보 이승만의 적격성에 대한 논란이었다. 이회영ㆍ신채호ㆍ박용만 등 무장독립운동계열 인사들이 ‘위임통치론’을 제기한 이승만을 거세게 비판하고, 의정원에서 이승만이 선출되자 이들은 회의장에서 퇴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외세에 의존하여 절대독립을 방해하는 사람이 새 정부의 수반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강하게 폈다. 
이승만은 상하이로 오지 않고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3ㆍ1혁명 이후 여러 곳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통합운동이 전개되었다. 각 정부가 추대한 정부 수반이나 각료가 상호 중복되어 있고 또 국내외 각지에 떨어져 활동하고 있어 미취임 상태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각각의 임시정부는 기능이 공백상태에 빠져들었고 원활한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와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단일정부로의 통합이 모색되었다. 
상하이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이며 내무총장인 안창호가 8월말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한성정부 및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민의회정부와의 통합과 정부개편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수차례의 논의 끝에 9월 6일 3개 정부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정부 수반의 호칭을 대통령으로 하는 새 헌법과 개선된 국무위원 명단이 발표되었다. 
통합 임시정부가 정부 수반을 국무총리에서 대통령으로 바꾸게 된 것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의 줄기찬 요구 때문이었다. 국무총리로 선출되고서도 부임하지 않고 미국에서 활동해온 이승만은 국무총리 아닌 대통령으로 행세하였다. 그는 대통령 호칭에 강한 집념을 갖고 있었다. 미국식 정치와 문화에 깊숙이 젖어 있어서 미국 정부의 수반 프레지던트란 호칭이 의식에 각인된 것이다.  
상하이임시정부는 수립 초기 정부령 제1호와 제2호를 통해 선포하여 내외 동포에게 납세를 전면 거부할 것(제1호)과, 적(일제)의 재판과 행정상의 모든 명령을 거부하라(제2호)는 강력한 포고문을 발령하였다. 그리고 국내조직으로 연통제와 교통국을 설치한 데 이어 해외에는 거류민단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관리하에 두었다. 연통제는 지방행정조직이고 교통국은 비밀 통신조직이었다. 국내의 무장ㆍ사상투쟁을 위하여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두고 1개 면에 1개의 교통소를 설치하도록 하고, 연통제는 각 도와 각 군에 지방조직을 갖춰나갔다. 그러나 1920년 말부터 일제의 정보망에 걸려 국내의 지방조직이 파괴되고, 3ㆍ1혁명의 열기가  점차 사그라지면서 국내의 독립기금 송금과 청년들의 임시정부 참여가 크게 줄어들었다. 
상하이임시정부는 이승만 대통령 선임을 둘러싸고 외무총장 박용만과 교통총장 문창범이 취임을 거부한 데 이어 이회영ㆍ신채호 등 무장투쟁 주창자들이 상하이를 떠나 북경으로 올라가 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가 러시아 정부가 지원한 독립운동 자금을 독자적으로 처리하여 물의를 일으키다가 1921년에 임시정부를 떠났다. 이에 임시정부는 이동녕 → 신규식→노백린이 차례로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정부를 이끌만큼 불안정한 상태로 운영되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이승만이 정부가 수립된 지 1년 반 만에 왔으니 임시 대통령으로서 무슨 방책을 준비해 온 것으로 믿고 기다렸으나, 특별한 방안을 내놓지 못하였다. 이승만에게 기대를 걸었던 임정 요인들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은 떠나는 이들을 붙잡아 포용하려는 대신 신규식ㆍ이동녕ㆍ이시영ㆍ노백린ㆍ손정도 등을 새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여 위기를 넘기고자 하였다.
당시 만주, 간도, 연해주 등지에서는 민족독립을 위한 무장독립전쟁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어 항일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단, 대한광복군, 광복군총영, 의열단, 의군부, 대한신민단, 혈성단, 신대한청년회, 복황단, 창의단, 청년맹호단, 학생광복단. 자위단 등이 결성되고, 특히 1911년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어 강력한 군사훈련을 통해 독립군 간부들을 양성하였다. 
만주 각지에서 조직된 무장독립군 세력은 연대하여 봉오동전투(1920년 6월)와 청산리전투(1920년 10월)를 통해 국치 이래 최대의 항일대첩을 이루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상하이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독선과 독주로 요인들이 하나둘씩 떠나가고, 실현성이 취약한 ‘외교독립론’에 빠져 있었다. 
이승만의 독선적인 정부 운영과 무대책에 실망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의정원의원들은 국민대회를 준비하면서 지도체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위원중심제 즉 일종의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작업을 시도하였다. 이승만이 이에 반대하면서 임정은 더욱 분열상이 가중되고, 이를 이유로 이승만은 1921년 5월 상하이를 떠나고 말았다. 
이승만의 1년 반 동안 임시정부의 활동은 이로써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떠났다. 얼마 후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하였다. 
초기의 이같은 분란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일제패망 때까지 27년 동안 항일민족해방투쟁의 본거지로서 독립전쟁을 지휘하였다. 이를 기리는 기념관이 이제야 문을 열었다.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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