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2·8독립선언의 역사적 맥락

도쿄 2·8독립선언의 역사적 맥락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2.02.0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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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을 병탄한 일제는 가혹한 무단통치를 통해 민족문화의 말살, 경제적 지배와 수탈로 한민족은 고사 상태에 빠졌다.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ㆍ열사들이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의 폭압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들은 중국ㆍ만주ㆍ노령ㆍ미주 등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혹은 지하로 숨어서 비밀리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18년 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원칙이 발표되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구상은 연합국과 대결하였던 독일ㆍ오스트리아ㆍ터키 등에 속해있던 식민지에 적용하려던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원칙 14개 조항의 일부로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이 원칙은 모든 피압박민족에게 민족해방운동의 복음으로 받아들여졌다.
중국 상해에 망명 중이던 독립운동가들은 이곳에서 발행되는 영자신문을 통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을 듣고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김규식을 파리로 파견하는 한편 장덕수를 일본으로, 여운형을 시베리아로, 김철ㆍ선우혁 등을 국내로 각각 파견하여 종교계와 각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접촉하게 하였다. 국내에서는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이 일제의 통제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더러는 해외의 인맥을 통해 전해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국제정세와는 별개로 1918년 음력 11월 만주ㆍ노령을 중심으로 해외에 망명한 김교헌ㆍ김동삼ㆍ조소앙ㆍ신채호ㆍ이시영ㆍ신규식ㆍ김규식ㆍ윤세복ㆍ김좌진ㆍ박은식ㆍ안창호ㆍ이승만ㆍ박용만ㆍ이동휘 등 39명이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 대한의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하고 일본의 한국 병탄은 사기와 강박과 무력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무오년에 선포되어서 ‘무오독립선언서’로도 불리는 이 선언서는 저명한 해외 망명인사 대부분이 서명한, 국치 이래 최초의 대규모적인 독립선언이었다. ‘선언’은 일제의 병탄은 무효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라”고 주장하면서, 2천만 동포들에게는 국민된 본령이 독립인 것을 명심하여 일제와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을 촉구하였다. 대한독립선언서는 국내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은밀히 전달되고, 일본에 있는 유학생들에게도 전해졌다. 
재일 한국 유학생들은 1918년 12월 15일자 ‘저팬 에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zer)’가 “한국인 독립을 주장”이란 제하에 미국에 있는 한인들이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정부에 제출하였다는 기사를 관심있게 보았다. 또 12월 18일자의 “약소민족들 발언권 인정을 요구”라는 기사에서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동맹회의 2차 연례총회가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약소민족의 발언권을 인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 한국대표가 이에 포함된 사실을 알게되었다.저팬 어드버타이저는 신호(神戶)에서 영국인이 발간하는 영자지여서 일본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이런 기사를 게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 유학생들은 이같은 국제정세를 자주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였다.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으로 국제정세의 변화, 해외 망명지사들의 대한독립선언서 발표, 그리고 상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의 소식에 접한 재일 한국 유학생들은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주체적으로 해석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1919년 1월 6일 ‘학우회’는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었다. 학생 연사들은 국제정세를 논하면서 지금이 조선독립운동에 가장 적합한 시기라고 열변을 토하여 장내를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고, 2ㆍ8독립선언의 씨앗을 뿌렸다. 
대표로 뽑힌 김상덕 등 실행위원들은 비밀리에 몇차례 모임을 갖고 거사에 관해 논의를 거듭하였다. 이들은 ‘학우회’나 ‘유학생친목회’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데 뜻을 모으고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독립단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및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를 발표하기로 하였다.     
‘선언서’와 ‘결의문’은 각각 600매, ‘청원서’는 1천매를 인쇄하였다. 서명자는 학생대표 중에서 11명이 선정되었다. 중형을 각오하고 대표에 뽑힌 이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최팔용(와세다대학생), 백관수(정칙영어학교학생), 윤창석(청산학원학생), 서춘(동경고사학생), 김철수(경응대학생), 김상덕(무직), 이광수(와세다대학생), 송계백(와세다대학생), 이종근(동양대학생), 최근우(동경고상학생), 김도연(경응대학생). 
실행위원들은 1월 7일 청년회관에서 약 20명이 참석한 가운데 준비사항을 보고하고 동의를 얻었다. 이제 결행만이 남았다. 2월 8일 오전에 완성된 ‘선언서’의 초안 1부는 송계백과 최근우가 비밀리에 국내로 반입하고,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청원서’는 우편으로 동경주재 각국 대사관, 공사관과 일본정부의 각 대신, 일본귀족원, 중의원, 조선총독 및 각 신문사로 발송하였다.
2월 8일 오후 2시, ‘학우회’ 임원선거회라는 명목으로 학생들을 소집하여,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역사적인 ‘2ㆍ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중국으로 떠난 이광수를 제외한 실행위원 10명을 비롯하여 600여 동경유학생 거의 전원이 참석했다. 
이날 대회는 회장 백남규가 개회를 선언하고 최팔용이 사회를 맡았다. 백관수가 ‘독립선언서’를, 김도연이 ‘결의문’을 각각 낭독하였다. 감격과 흥분으로 이들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침착하게, 또렷또렷하게 읽었다. ‘결의문’이 만장일치로 통과되고 거리시위에 나서려는 시각에 관할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장이 수십 명의 경찰을 대동하고 나타나 대표들을 감시하는 한편, 대회를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학생들이 쉽게 물러나지 않고 난투가 벌어졌다. 대회진행 중에 일경이 행사장에 난입했다는 증언도 있다. 
대회에서 학생들이 선포한 ‘독립선언서’는 서두에서 한국은 43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자주독립국임을 강조하며, 한민족의 독립근거와 그 정당성을 천명하였다. 이어서 일제침략과 국권찬탈이 사기와 무력에 의한 수치스러운 폭거였다고 전제하고, 왜 한민족이 그동안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야 했는가 하는 이유를 당당하게 밝혔다.
또 일제의 조선 통치정책은 한민족의 모든 자유를 짓밟고 민족차별과 생존권 박탈을 자행한 고대적 노예정책이었다고 비난하고, 자유를 위한 조선민족의 투쟁은 앞으로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선언서는 이어서 한민족의 독립운동으로 건립될 국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임을 명시하고 세계평화와 인류문화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학생들은 이날 대회에서 ‘독립선언서’의 발표에 이어 독립운동의 구체적 방안을 논의하고자 하였으나 일경이 주도 인물들의 구속과 대회의 방해로 더 이상 진척되지는 못했다.
국내로 들어온 학생들을 제외한 10명의 서명자를 비롯 모두 17명이 검거되었으나 서명자들만 히비야(日此谷) 경찰서로 끌려갔다가 2월 20일 동경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송치되고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일제는 수감된 대표자 9명에 대해 반년 동안 2심까지 재판을 끌고갔다. 검사는 선언서 가운데 ‘혈전(血戰)’이란 용어 등을 문제삼아 이들을 내란죄로 기소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3ㆍ1혁명이 일어나 민족적인 봉기가 시작되는 등 여론에 밀린 일제는 내란죄 적용을 하지 못하고 출판법 위반의 죄명으로 이들을 기소했다. 
2ㆍ8독립선언은 국치 9년 만에 적의 수도 한복판에서 조국의 청년 엘리트들이 전개한 민족독립운동의 금자탑이었다. 일제에게는 한민족이 결코  병탄에 굴복하지 않는 자주독립민족임을 선언하고, 국내적으로는 민족지도자들을 분기시켜 3ㆍ1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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