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 버린 독립운동가 이회영 일가

기득권 버린 독립운동가 이회영 일가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1.12.30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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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2월 30일 한밤중에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는 무리가 있었다. 남자들은 무거운 짐을 지게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인 그야말로 남부여대의 행렬이었다.
일본군 국방수비대의 검사가 있었지만 워낙 추운 날씨이고 초라한 행렬이라 그대로 보냈다. 당시 빚을 진 조선 농민들의 야반도주로 보았던 것 같다. 일제가 두고두고 개탄했던 삼한갑족 우당 이회영 일가의 망명길이다
흔히 지식인의 유약성이 논의되지만, 우당은 조선 선비의 신분으로서 해외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창설하고 이후 줄곧 신채호ㆍ박용만 등 무장투쟁론자들과 함께하였다. 죽음의 길이 된 만주행 역시 그곳 독립운동가들과 무장전쟁을 준비하고자 함이었다.
그의 사유의 세계는 문ㆍ무의 영역에만 갇힌 것도 아니었다. 해방 조국의 미래상으로 무강권, 비폭력의 아나키즘에 이르렀다. 관념이나 공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고 준비하였다.  
삼한갑족의 후예로 태어났으나 다른 양반집 자제들처럼 과거 공부에 전념하지 않고 서예와 시문은 물론 음악과 회화, 미술ㆍ전각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하였다. 청년시절에는 수학ㆍ역사ㆍ법학 등 신학문도 공부했다.
막역한 지우인 이상설, 친동생 이시영까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갈 때, 그는 관직보다 불평등한 봉건적 사회인습과 계급적 구습을 타파하려는 길에 나선다. 
여기에는 조선말기의 대문장가이고 사상가인 이건창ㆍ이건승 형제로부터 배운 양명학의 영향이 컸다고 할 것이다. 형식보다는 실질을 중시하고 지행일치 즉 아는 것과 실행하는 것을 일치하는 학문이었다. 그는 집안의 머슴들에게 높임말을 쓰고 청상과부가 된 여동생을 부모 몰래 개가시켰다. 
서울 상동교회 부설로 설립된 민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 학감이 되어 청년 교육에 전념하고, 안창호ㆍ신채호ㆍ노백린ㆍ이동휘ㆍ양기탁 등과 비밀리에 신민회를 조직하고 활동한다. 신민회는 최초의 공화주의 단체이다. 
나라가 왜적에게 망하던 1910년 12월 말 6형제 가족 40여 명과 해방시켰으나 나가지 않고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노비 20여 명은 한밤중에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한다.
경학사에 이어 신흥강습소(후에 신흥중학→신흥무관학교로 개칭)를 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총 35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고 이들이 봉오동ㆍ청산리대첩의 중심이 되고 김원봉 등  조선의열단ㆍ조선의용대ㆍ한국광복군의 핵심이었다. 그는 이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의원, 베이징에서 각급 독립운동 단체 조직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도 간부직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묵묵히 뒤에서 지원을 한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고, 공적을 포장하지 않았고, 자신을 낮추어 살아가는 지도자, 민족의 설움과 동지들의 아픔을 다독이며, 목숨에 여벌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목숨을 건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목숨보다 공의와 대의를 앞세웠다. 
이회영은 100년 전인 1922년 베이징에서 이을규ㆍ이정규ㆍ유자명 등과 러시아의 맹인 시인이자 사상가이며 아나키스트인 에로센코를 초청하여 러시아 혁명과정에서 벌어진 공산주의 모순성을 토론하고 ‘행동하는 자유주의’ 아나키스트운동을 시작한다. 이 운동에는 신채호ㆍ김창숙 등이 참여하고, 베이징대학의 저명한 문학가 루쉰, 그리고 타이완 출신의 판번량 등과 연대하게 된다. 
그는 이 시기에 아나키스트운동의 표본으로 중국 후난성 양도천에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다. 그리고 신채호ㆍ김창숙ㆍ류자명ㆍ김원봉과 항일 무장투쟁을 위한 행동조직인 의열단을 후원하는 한편, 이을규 이정규ㆍ정화암ㆍ백정기 등과 아나키스트운동의 중심이 될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정의공보’를 발간하며 일제와 싸운다. 
우당은 중국에서 무장투쟁의 주도권이 점차 공산주의자들의 손으로 넘어가자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을 모아 신흥학우단을 조직하고, 아들 이규학과 조카 이규준, 그리고 신흥학우단 출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비밀 지하단체 다물단을 조직, 지휘한다. 다물단은 중국내 우리 독립운동 단체에 침투한 일제의 고등밀정 김달하를 처단하는 등 큰 역할을 하였다. 
우당의 활동은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1927년 중국 푸젠성 천주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돕는 농민자위군운동에 참여하고, 더불어 중국의 저명한 아나키스트들과 상하이에 노동대학 설립을 추진한다. 하지만 양도천의 이상촌 건설이나 상하이의 노동대학 설립은 자금난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이 무렵 그의 베이징 집은 독립운동가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지역ㆍ계층ㆍ연령을 불문하고 독립운동가들이 베이징에 오면 으레 그의 집에 들르고, 며칠 동안 심지어는 몇 달까지 머물렀다. 신채호ㆍ김창숙은 물론 소설 ‘상록수’의 작가가 된 심훈도 그 집의 신세를 졌다. 
우당 내외는 재산이 바닥이 나서 궁핍한 속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을 흔연히 접대하고, 부인 이은숙이 몇 차례나 비밀리에 입국하여 친정에서 자금을 갖고 와서 남편과 독립운동가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부인은 심지어 마을의 텃밭에 배추를 심어 독립운동가들에게 김치를 담가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당은 그림 솜씨가 대단했다. 독립운동 자금이 떨어지면 난초를 쳐서 팔기도 했다.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의 화법을 배운 우당의 난 그림은 중국에서 널리 알려졌다. 지금 서울의 우당 이회영기념관에 몇 점이 보관되어 있다. 
우당은 또 식량이 떨어지거나 괴로울 때면 손수 만든 퉁소를 불면서 마음을 달래고 고향생각을 하는 젊은 독립운동가들의 향수를 달래주었다. 그릇이 크고 인품이 고결하여 독립운동가들이 이념과 노선을 막론하고 그와 친교를 맺으려 하고 그의 곁으로 몰려왔다.
65세가 되는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과 만보산사건 등으로 만주 지역의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심한 어려움에 놓이게 되었다. 우당은 상하이ㆍ베이징 등으로 철수한 독립운동가들을 모아 남화한인연맹을 결성하고, 이어서 정화암ㆍ백정기ㆍ중국인 왕야차오 등과 상하이에서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한다. 산하에 흑색공포단을 만들고, 흑색공포단은 일본영사관을 폭파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1932년 11월 17일 침체된 독립투쟁을 다시 전개하기 위해 동지들과 비밀리에 만주에 항일의용군의 결성과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우고, 상하이에서 다렌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밀정에게 정보가 누설되어 다렌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수상경찰에 검거되어 모진 고문 끝에 뤼순감옥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다. 67세 때이다. 망명 22년 만에 독립운동의 원로는 이렇게 순국한다.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할 수 없다”는 니체의 말처럼 우당은 애국심, 인간성이나 철학, 신뢰감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예술성에 이르기까지 ‘깊이’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조선왕조의 황족이나 대신 대부분이 매국을 하거나 친일파가 될 때 그와 그의 일족은 모든 기득권을 던져버리고 해외로 망명하여 무관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독립운동을 하고, 6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지도하러 가던 중 일제에 피검되어 순국하게 되었다. 
그가 갇혔던 감옥은 안중근의사가 처형되고 신채호선생이 옥사한 뤼순감옥이다. 우당은 이 감옥에서 모진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입을 다물고 만주 무장투쟁의 계획과 동지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고문으로 숨지게 되었다. 우당은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노블레스 오블리주’(고위직에 있는 사람은 그만큼 더 많은 책임을 갖고 헌신하라)를 실천한 겨레의 사표가 되었다.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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