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쓸이’ 전두환시대의 유행어

‘싹쓸이’ 전두환시대의 유행어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1.12.1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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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서울의 봄’은 화창하게 열렸다. 온 국민의 기대를 모으며 독재의 긴 터널을 지나 서울의 찬란한 봄이 개막된 것이다. 60년대의 봄이 4월혁명으로 희망차게 열렸고, 70년대의 봄 역시 민주회복을 다지면서 밝게 개막되었듯이, 80년대의 봄은 그야말로 민주화의 소망을 안고 찬란하게 열렸다.
설마 60년대의 봄을 짓밟은 5ㆍ16쿠데타나 70년대의 봄을 앗아간 유신정변과 같은 폭거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국민은 80년대의 새 봄을 맞았다. 그러나 다시금 춥고 어두운 반동의 역사가 예비되고 있었다. 
‘계엄정국’의 요상스런 안개가 ‘신군부’와 ‘유신잔당’에 의해 꾸역꾸역 피어올라 ‘안개정국’이 되고 최규하의 2원집정부제란 희한한 제안이 정국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곁들여 신현확 총리는 중정부장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겸임 발령하면서, “법이란 형식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범위는 넓을수록 좋다”는 법논리의 왜곡발언까지 하여 이미 새 시대의 모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인 잃은 공화당은 정풍파동으로 왕년의 실력자 이후락이 출당되었다. 이씨는 부정축재와 관련 “정치자금을 만지다 보니 떡고물 좀 만졌다”라고 변명했는데, 반대 측에서는 “떡고물이 떡보다 더 많아서 문제”라고 반박, ‘떡고물 논쟁’이 유행어가 되었다. 관청이나 기업체할 것 없이 떡고물 좀 먹자, 떡고물 좀 없느냐, 떡고물 남는 일이냐는 따위의 부정ㆍ비리를 의도하는 은어가 나돌아 부패의 한 단면을 내보였다. 
서울의 봄, 민주화의 봄은 ‘3김시대’를 의미할 만큼 김대중ㆍ김영삼ㆍ김종필의 정치판이 되다시피 했다. 김대중의 ‘동교동’, 김영삼의 ‘상도동’, 김종필의 ‘청구동’이 각각 정치적 상징성을 띠고 거명되었다. 김영삼 총재는 순리설을 펴면서 신민당의 집권이 역사의 순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연의 봄이 꽃샘바람에 시달리듯이 서울의 봄은 정치군인들에 의해 다시 짓밟혔다. 신군부는 5ㆍ17 전국계엄확대 조치를 취하면서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대부분의 야당 정치인들이 규제당한 채 ‘바보들의 행진’이라 불린 제11대 국회가 구성되고 “1ㆍ2ㆍ3중대”라 불린 정당이 편성된다. 국회가 열리고 정당이 결성되었지만 국회는 ‘애 보는 국회’ ‘통과부’란 조롱 속에 제도권의 비좁은 영역에 안주한다.
전두환 정부는 스스로 ‘새시대’라 부르면서 ‘정의사회’라는 거창한 구호 아래 행군을 시작한다. 그러나 82년의 장영자사건과 83년의 명성사건, 영동사건이 잇따라 터졌고 이것을 합쳐 ‘장명동(張明洞)사건’이라 불렀고, 게다가 민정당 대표와 국회부의장을 지낸 정래혁의 엄청난 부정비리가 터지게되자 세간에서는 이것을 엮어 ‘정이사회(丁李社會)’란 이름으로 비꼬았다.
‘싹쓸이’란 말도 화투판의 신종용어로 대단한 인기(?)를 차지했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똑똑한 놈 3명”(3김)까지를 포함, 모든 것을 쓸어버린 데서 고스톱판의 싹쓸이 종목이 위력을 과시하게 된 것이다.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를 일컫는 ‘영부인’의 위력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주걱턱’이란 은어가 전파력을 과시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대머리와 주걱턱 시리즈는 대학가의 단골 메뉴처럼 애용되었다. TV는 뉴스 시간마다 시보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하는 뉴스를 내보내 ‘땡전뉴스’라는 유행어도 생겨났다. 이 역시 널리 퍼져 시청료 거부운동의 계기가 된다. 영부인 이순자의 위력은 ‘박사 위에 육사, 육사 위에 보안사, 보안사 위에 여사(이순자 지칭)’라는 유행어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여사는 그만큼 막강하여 새세대육영회 등 많은 ‘사회사업’을 벌이고 비난을 샀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사건이 터졌을 때는 ‘독도는 우리땅’이란 대중가요가 크게 히트했는데, 웬일인지 전두환 정부는 이 노래를 금지시켜 독도문제가 국민의 궁금 사항이 되었다.
이산가족 찾기는 5공정권이 모처럼 국민의 아픔을 달래주는 행사였다. 오랜 이산 끝에 만난 혈육이 서로 부둥켜안고 ‘맞다 맞아’라고 소리친 말이 금방 유행되었고,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란 대중가요가 리바이벌되었다.
경제비리의 큰 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막후에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큰손’이라 불렀고, 군장성들과 국회의원들이 술판에서 추태를 벌인 국방위 회식사건이 ‘별들의 전쟁’이란 알쏭달쏭한 이름으로 전파되어 국민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이때부터 ‘폭탄주’가 유행하여 명동일대 룸살롱에 폭탄주ㆍ수소탄주ㆍ양성자탄주 등이 성행했고, 애꿎게도 한 호스티스가 손님이 권하는 폭탄주를 과도하게 마시다 숨지는 사건이 빚어졌다.
반미의 무풍지대로 불리던 한국에서 5공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미문화원 방화사건 등이 심심치 않게 터져 점차 반미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양키고홈’은 대학가 시위의 전용구호로 등장했다.
중국 민항기 불시착 등으로 자주 공습경보가 울리자 ‘실제상황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불신심리가 확대되었다. 연습 때는 그토록 심하게 공습경보를 울린 당국이 막상 중국 민항기의 불시착에는 꿀 먹은 벙어리여서 실제상황이란 말이 나돌게 되었다. 
또한 대학총장 출신 김상협 총리의 “막힌 것은 뚫고 굽은 것은 펴겠다”는 취임사 내용이 쉽게 유행을 탔는데, 대독(代讀) 총리와 불신시대를 상징한 유행어로만 남게 되었다.
대학입시를 둘러싸고 ‘눈치 지원’ ‘배짱 지원’ 등의 용어가 나타난 것은 80년에 이루어진 교육개혁 조치의 졸렬성에서 기인한다. 졸정제, 삼민투, 주사파 등 줄임말도 학원가의 한 풍속도라 하겠다.
민주화추진협의회가 결성되면서 재야인사들의 반체제투쟁이 조직화 되고, ‘재야인사들의 식사문제’라는 희한한 표현의 김영삼 단식사건과 해외망명중이던 김대중의 급거 귀국, 그리고 필리핀 피플파워의 승리에 힘입어 2ㆍ12총선은 신당이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제1야당이었던 민한당이 ‘사이공 최후의 날’처럼 붕괴되어 ‘야권통합’이 이루어지고 정국은 파워게임, 제로섬 게임의 대결장으로 변해 4ㆍ13 호헌조치가 나타난다. 이로 인해 ‘마주보고 달리는 두 기관차’의 형국이라는 외국 정치인의 표현이 절묘하다는 상황 속에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터졌다. 문귀동 경장은 “가슴 부위를 손으로 3ㆍ4회 쥐어박았다”라며 변명에 급급했고 당국은 사건을 숨기느라 온갖 조작을 일삼았다.
이민우 파동에 이어 ‘두 호메이니’에 의한 신당 결성, 이때 나타난 ‘용팔이’의 대낮 폭력행사, 코미디언 김병조의 ‘지구를 떠나거라’란 대사, 민정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 때 “국민에 정을 주는 민정당, 고통을 주는 통일민주당” 운운의 말썽, 박종철군의 물고문 사망 등 걷잡을 수 없는 사건 사태가 암울한 시대를 더욱 거세게 휘몰아쳤다.
박종철군을 구타와 물고문으로 죽인 경찰의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허위발표, 은페조작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도덕성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혀 6월 민주화 평화대행진으로 나타났다. 이에 위기감을 느껴 집권세력은 대통령직선제, 김대중 사면복권을 골자로 하는 6ㆍ29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고 이것은 ‘항복문서’라는 말로 정리되었다. 
국민이 항복문서를 받아내기까지에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많은 사람이 ‘의문사’를 당했고, 그보다 많은 사람이 좌경용공으로 몰려 투옥되었으며, 이한열군 등은 최루탄에 맞아 숨지기까지 했다. 
‘위장취업’ 근로자들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이념서적’들이 금서의 딱지로 압수당했으며, 운동권 인사들이 무더기로 구속되고 가택이 압수수색되었으며, 민주인사들이 ‘닭장차’의 신세를 졌다.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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