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흑사·을사오적이 모두 판사 출신

사법흑사·을사오적이 모두 판사 출신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1.11.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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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맺어진 날이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제에 강탈된 것으로 알려지지만 사실상 국권을 빼앗긴 것이다. 이로써 서울에 일본통감부가 설치되고, 전국적으로 일제 경찰이 배치되어 치안이 그들 손아귀에 넘어갔다. 또한 이른바 고문정치라 하여 각 부처에 일본인과 친일외국인을 고문으로 임명하여 인사ㆍ재정 등 주요 내정이 그들에게 장악되고 사실상 조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을사늑약이 강제된 날은 하늘도 슬퍼했던지 궂은 비가 내리고 서리치는 날씨이기도 해서 이같은 날을 을씨년스럽다고 일컫게 된 사연이다.
1905년 11월 15일 일왕의 특파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알현하여 한일 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이토는 이에 앞서 11월 10일 고종에게 일왕의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하여 조치하소서”라는 오만무례한 내용의 친서를 바쳐 고종을 위협하고 이날 다시 나타나 강박한 것이다.
이 무렵 조성왕궁은 하야시 일본공사와 하세가와 주한 일본군사령관이 본국으로부터 증원군을 지원받아 궁궐 내외에 물샐 틈 없는 경계망을 펴고 호위함으로써 공포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일본은 한국을 병탄하기 위한 사전조치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으려는 목적으로 5개조의 조약을 일방적으로 만들었다. 일제는 이 조약을 맺기 위해 고종을 강압하고 나선 것이다.
고종은 이토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조약 승인을 거부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전략을 바꾸어 조정대신들을 상대로 위협ㆍ매수에 나섰다. 주한공사 하야시는 11일 외부대신 박제순을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체결을 강박하고, 같은 시간 이토는 모든 대신과 원로대신 심상훈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되풀이했다.
이렇게 회유와 강압 끝에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이토와 하야시는 마침내 11월 17일 덕수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그러나 회의는 침통한 공기만 감돌았을 뿐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고종은 이렇다 할 의견 개진이 없이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한 상태였다. 어전회의가 5시간이 지나도록 결론에 이르지 않자 초조해진 이토는 하세가와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수십 명의 일본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고종에게 노골적으로 위협과 공갈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이토는 살기 띤 모습으로 직접 메모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냐 부냐를 따져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만이 무조건 ‘불가’를 썼고,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의’를 표시했다.
이토는 각료 8대신 가운데 5대신이 찬성하였으니 조약 안건은 가결되었다고 주장하고 궁내부대신 이재극을 통해 그날 밤 황제의 칙재(임금이 옳고 그름을 가림)를 강요했다. 그리고 같은 날짜로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간에 이른바 ‘한일협상조약’(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이에 찬성 또는 묵인하여 조인을 거들어준 다섯 매국노를 ‘을사5적’이라 한다. 을사5적은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다섯 대신을 가리킨다.
당시 대신으로서 수상격인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은 조약에 반대했고, 궁내부대신 이재극은 조약체결과 직접 관계가 없었다. 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했던 한규설은 일본의 강압으로 물러가고, 조약에 조인한 외부대신 박제순이 참정대신이 되었다. 따라서 을사5적에 박제순을 포함시킨 것이다.
해방 70여 년이 지난 최근에야 검찰개혁은 공수처 출범으로 궤도에 올랐다. 성패는 관계자들의 운영에 따라 갈리겠지만 기대해온 권력기관 교체의 첫발을 내디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재벌ㆍ정치ㆍ족벌언론과 함께 가장 불신의 대상으로 꼽힌 지 오래인 사법부는 여전히 개혁의 외곽 지대에 놓인 채이다. 최근 임성근 부장판사가 사법사상 처음으로 국회의 탄핵을 받았으나 헌법재판소가 기각하고, 김명수 대법원장의 일탈된 언행이 세간의 지탄을 받았지만, 사법개혁은 요원하다.
막힌 물은 썩기 마련, 박근혜 정권과의 유착으로 국민적 분노가 따랐으나 수장의 교체 외에는 자체정화의 노력은 거의 없었다. 양승태 법원행정처 간부들은 ‘봐주기 재판’으로 대부분 풀려났다. 국민에게 사법부(腐)라는 지탄, 여전히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굳어진 인식 상태에서 날로 극심해지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은 사법부의 권능을 더욱 강대한 권력기관으로 만들고 있다. 
서구의 근대적 사법정신이 ‘정의의 저울’로 상징된다면 우리의 경우는 부끄럽게도 을사5적에서 기억된다. 앞에서 본대로 을사늑약에 서명한 5적이 모두 판사출신이다. 학부대신 이완용은 평남과 전북재판소판사, 외부대신 박재순은 평리원 재판장서리, 군부대신 이근택은 평리원 재판장, 내부대신 이지용은 평리원 재판장과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평리원 재판장 서리를 각각 역임했다. 
우연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공통점이 있었을까, 어째서 애국심과 공정을 생명으로 삼아야 할 조선왕조 말기의 판사와 재판장 출신들이 하나같이 일제에 주권을 넘기는 을사늑약에 도장을 찍은 매국행위를 자행했을까, 평리원(平理院)은 고종이 의금부를 고등재판소로 개칭했다가 바뀐 사법기관이다. 을사늑약 뒤 순종이 다시 공소원과 대심원으로 나누어 같은 명칭을 붙였다. 우리나라의 근대적 사법기관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을사오적은 병탄 뒤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후예와 추종자들은 일제강점기 기득권층이 되었다. 해방 후 사법부 수장을 비롯 판검사ㆍ변호사 중에는 친일부역자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청산과 반성의 과정 없이 오롯이 이승만 정권으로 이어졌다. 
이승만의 조봉암 사법살인, 박정희의 인혁당관련자 처형,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날조사건 등은 모두 판사(대법관)들이 하수인 역할을 하였다. 우리 사법부는 독재정권에서는 칼잡이가 되고 부패정권과는 유착했다. 이른바 ‘정찰제’ 판결을 비롯 검사 논고와 판사 판결문이 복사판이 되는 ‘자판기판결’ 사례도 많았다. 양심수들이 정보기관과 검찰에서 당한 고문을 법정에서 호소할 때 판사의 외면이 가장 가슴 아팠다는 증언이 수두룩하다. 마침내 박근혜 정부에서 사법농단이 폭로되고 촛불혁명을 불러왔다. 재판이 아닌 ‘거래’가 횡행했었다. 
민주화 시대에도 국민의 법 감정이나 상식에 동떨어진 판결이 물결친다. 사법부는 여전히 국민의 신뢰와는 동떨어진 상태다. 3200명의 법관 중에는 정의롭고 양심적인 분들도 많다. 예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침묵하거나 외면하면서 사법부는 바뀌지 않았다. 민주주의 근간인 사법부의 제도적 독립은 오래 전에 이루어졌는데 독립의 생명인 공정성이 부족하기에 여전히 불신의 대상이 된다. 공정성은 내부구성원들의 몫이 아닌가. 
판사는 임관할 때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심판하고 법관 윤리강령을 준수하며, 국민에게 봉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선서한다. 검사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가 될 것을 선서한다. 법관과 검사들이 초임 때의 순정한 마음으로 다짐했던 ‘선서’대로만 직무를 수행하면 공정사회가 가까워질 것이다. 그래서 사법권은 독립에 못지않게 공정이 생명이다. 판사들이 법조귀족(과 신성가족)이 아닌 정의와 신뢰의 상징이 되는 사법개혁이 요구된다. 자율개혁이면 더욱 좋을 것이다.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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