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역사상 1천년 래 제일대사건’이라면

‘조선역사상 1천년 래 제일대사건’이라면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1.11.1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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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1880~1936)는 항일언론인, 계몽사상가, 전기작가, 혁명문인, 민족사학자, 아나키스트 등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57년의 생애를 오롯이 조국해방운동에 바친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길지 않은 삶, 그 중에서도 8년 동안의 옥살이를 빼면 50년도 채 안 되는 생애에서 참으로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일을 했다. 전문가라도 한 분야에서 이루기 어려운 일을 단재는 모두 해냈고, 각 분야의 정상수준이 되었다. 자신의 표현대로 “사필(史筆)이 강하여야 민족이 강하고 사필이  무(武)하여야 민족이 무(武)하다”는 정신이었기에 가능했다. 
한국의 근대사학은 단재에서 비롯된다고 할만큼 그의 사학은 중세적인 유교사관을 혁파하고 새로운 민족사관을 정립하는데 기여했다. 유교사관이 추구해온 존왕양이적(尊王壤夷的)인 정통론을 내세우는 왕조사 중심의 사대주의사관을 극복하고 민중중심의 민족사관을 정립했다.
단재는 국내에서 활동할 때와 중국 망명기에 많은 사서와 사론을 집필했다. ‘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 ‘독사신론’, ‘조선사연구초’등 저서와 ‘평양패수고’, ‘전후삼한고’, ‘조선역사상 1천년 래 제일대사건’, ‘낭객의 신년만필’등 사론을 썼다.
그동안 전문가들에 의해 단재의 사서와 사론이 연구ㆍ분석ㆍ평가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사관의 핵심적 노작이고 현재에도 음으로 양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조선역사상 1천년 래 제일대사건’이라는 사론은 비교적 연구가 덜 되고 있다. 단재가 이 글에서 ‘삼국사기’와 그 저자 김부식, 신라 말기 최치원 등을 사대주의 원조라고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 이유인지는 헤아리기 어렵다. 또 반역자와 요승으로 낙인되어온 정여립과 묘청을  혁명가로 평가하는 등 진보적인 사관의 ‘현재성’에도 원인이 있는지 모른다.
단재는 1925년(46세) 안질로 고통을 느끼면서 북경 일우에서 ‘조선역사상 1천년 래 제일대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론의 핵심은 묘청 일파가 1135년(인종 13) 개경의 문벌 귀족에 대항해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칭체건원, 금국정벌 등 자주적인 국가를 세우고자 기도했으나 수구기득권 세력에 토벌당함으로써 이후 사대모화의 국가로 이어지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단재는 이 글에서 본래 대륙에서 출발한 우리 민족이 반도국가로 전락하고 세상이 온통 잔약ㆍ쇠퇴ㆍ부자유의 길로 들어가게 된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서경전역’의 실패가 고려, 조선, 1천년 동안의 가장 큰 사건이라 분석한다.  
“옛 성현의 말이면 그대로 좇고 선대(先代)의 일이면 그대로 행하여 세상을 온통 잔약ㆍ쇠퇴ㆍ부자유의 길로 들어가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왕건의 창업 때문인가, 위화도의 회군 때문인가, 임진왜란인가, 병자호란인가, 사색당파인가, 양반과 상인의 계급 때문인가. 문을 귀하게 여기고 무를 천시한 폐단인가, 정주학설(程朱學說)이 끼친 해독 때문인가. 무슨 사건이 앞에서 말한 종교ㆍ학술ㆍ정치ㆍ풍속 각 방면에 노예성을 낳게 하였는가. 나는 한 마디로 대답하여서 고려 인종 13년(1135년) 서경전역(西京戰役) 즉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함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서경전역의 양편 병력이 서로 수만 명에 지나지 않고 전역의 기간이 2개년도 안 되지만 그 전역의 결과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은 서경전역 이전에 고구려의 후예요 북방의 대국인 발해 멸망의 전역보다도, 서경전역 이후 고구려 대 몽고의 60년 전역보다도 몇 갑절이나 더한 사건이니 대개 고려에서 이조에 이르는 1천년 사이에 서경전역보다 더 중요한 대사건이 없을 것이다. 
서경전역을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의 군대가 반란의 무리를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적 관찰이다. 그 실상은 전역이 곧 낭불양가(郎佛兩家)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당(獨立黨) 대 사대당(事大黨)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다.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이었던 것이다. 이 전역에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ㆍ보수적ㆍ속박적 사상 즉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ㆍ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1천년에 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단재는 서경전역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고구려의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과 낭가사상, 국선, 선랑, 풍류도, 풍월도 등 한국 고유사상을 설명하고, 유교의 형식 논리와 존화주의의 폐해, 불교의 타락상과 이들 종교간의 대립과정을 엄격하게 비판한다.
평소 묘청 등 개혁파와 대립했던 김부식은 토벌의 공으로 문하시중 등 조정의 실권자가 되었다. 권신배들이 권력을 잡으면 국사(역사)에 칼질을 하고자 하는 것은 고금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김부식은 집현전태학사, 감수국사의 책임까지 맡아 고려 당시의 국사를 입맛대로 고치는 동시에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그리고 전래의 사서, 사료를 모두 없애버렸다. 이때에 소실된 사료를 단재는 소상히 기록하였다. 
단재는 우리나라가 압록강 강북을 포기하여 중국에 양도한 것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던 때부터라고 보았다. 만주 벌판의 광대한 강토에서 고구려를 계승하여 번영하였던 우리 민족 국가인 발해를 우리의 민족국가로 보지 않고 국사에 편입하지 않은 것이 우리나라가 한반도의 소국으로 고정된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고 보았다. 단재는 김부식이 발해를 우리 국사에 편입하지 않음으로써 나타나게 된 문제점으로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1. 조선민족이 자기 민족 영웅에 대한 숭배심을 감살한 점.  2. 조상 전래의 강토인 요동과 만주 일대를 후인들이 망각한 점. 3. 대국이 소국이 되고 대국민이 소국민이 된 점. 
단재가 이 사론을 집필한 목적은 결론 부문에서 다음과 같이 집약하고 있다.
“이상 서술한 바를 다시 간단히 총괄하여 말하면, 조선의 역사가 원래 낭가의 독립사상과 유가의 사대주의로 분립하여 오다가 갑자기 묘청이 불교도로서 낭가의 이상을 실현하려다가 그 거동이 너무 이치에 맞지 않고 망령되어 패망하고 마침내 사대주의파의 천하가 되어 낭가의 윤언이 등은 유가의 압박 밑에서 잔명을 구차히 보존하게 되고, 그 뒤에 몽고의 난을 지나매 더욱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게 되고, 이조는 그 창업이 곧 사대주의에 의하여 이루어지매 낭가는 아주 멸망하여 버렸다. 
정치가 이렇게 되매 종교나 학술이나 그 밖의 모든 것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되어 불교를 믿으면 의양(依樣)의 봉갈(捧喝)을 전수하는 태고(太古)나 보우(普愚)가 날지언정 평지에서 우뚝 솟은 원효(元曉)가 날 수 없으며, 유교를 따른다 하면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법도를 각별히 따르고 존경하는 퇴계(退溪)나 율곡(栗谷)이 될지언정 학문의 길을 스스로 세우는 정죽도(鄭竹島), 정여립은 설 곳이 없으며, 비록 세종의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뒤라 할지라도 원랑도(原郞徒)를 기리는 노래는 나오지 않고 당나라 사람의 음풍농월을 읊조리는 한시가(漢詩家)가 가득차 있으며, 비록 갑오년과 을미년의 시기를 만난다 할지라도 진흥대왕 같은 경세가(經世家)가 나오지 않고 외국의 세력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가 될 뿐이니 아, 서경전역이 역사상에 끼친 영향을 어찌 중대하다 아니 하겠는가.”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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