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의 관풍> 5·18 오해와 왜곡, 이제는 끝내야 한다

<김성의 관풍> 5·18 오해와 왜곡, 이제는 끝내야 한다

  • 기자명 김성 소장
  • 입력 2021.10.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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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과연 5·18, 전두환, 집단발포, 헬기사격, 신군부 등 1980년에 있었던 광주민중항쟁의 키워드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여기에 대해 국민의힘 대선 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그 답을 알려주었다.

5·18은 이제 우리 사회의 기둥인 20~30대와 40대 초반 세대들이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역사적인 일이 됐기 때문에 진상을 통한 개념 정리가 대단히 중요하다. 하여 그 실상을 되돌아봄으로써 더 이상의 오해와 왜곡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필요하게 됐다.

저급한 역사의식 드러낸 미래 정치지도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지난 화요일 “우리가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잘못한 부분이 그런 부분이 있지만, 그야말로 정치를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 호남분들도 그런 얘기를 한다”며 전두환처럼 전문가에게 행정을 맡기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여당과 국민은 물론 자당(自黨)인 야당 내에서까지 거센 비판이 일었다. “‘이완용이 나라 팔아먹은 것 외에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한 것 외에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비판이었다. 처음에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버티다가 이틀 뒤 ‘유감’ 표시를 했고, 그래도 비판여론이 가라앉지 않자 사흘째 되던 날에 SNS로 “송구하다”고 했다. 여기에다 공교롭게 자기가 기르는 개에게 인도사과를 주는 사진을 SNS에 올렸다가 “개에게 사과하느냐”는 비판까지 일자 그제서야 직접 ‘사과’했다.

윤 전 총장은 타자(他者)의 말을 빌린 것처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생각의 일단을 노출시킨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표시하는 측도 많았다. 그는 그의 말대로 5·18 이후 서울대 법대 재학중 모의재판에서 전두환에게 무기징역을 내리기도 했고, 헌법 전문(前文)에 5·18을 넣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검찰에 재직하던 중에 전두환을 비롯한 5·18 가해자들에 대한 조사와 판결도 잘 지켜보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을 양시양비론으로 평가한 것은 과연 옳은 것일까. 전두환은 과연 군사 쿠데타와 5·18을 빼곤 부정적인 면이 없었던 걸까. 대통령 경선 후보자마저 이런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 형편이기에 아직도 수많은 국민들, 지역별·세대별·성별·경력별로도 여전히 실상을 모르고 오해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여 윤 전 총장의 발언을 계기로 오해하고 있는 5·18과 기록에 나와있는 내용만을 바탕으로 전두환의 실상을 정리해 보기로 하자.

처절했던 5·18과 전두환 역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에게 피살되자 계엄령이 내려졌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에 앉아 수사를 핑계로 군 세력을 개편하기 시작했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계엄사령관은 전두환의 힘이 강해지자 그를 전출시키려 했다. 이를 눈치챈 전두환은 역으로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군사반란(12·12사태)을 일으켜 군을 장악했다. 이후 전두환을 추종하는 일부 군부는 ‘신군부’라는 이름을 붙여 개혁세력인양 위장하고, 중립을 지키고 있던 대부분의 군인들을 구군부라는 나쁜 이미지로 오해하게 만들었다. 신군부는 자기들이 저지른 내란사태를 덮기 위해 언론 검열강화, 군개편 등을 통해 정권장악에 나섰다. 전국의 대학생들은 5월 15일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이다가 군과 경찰의 투입정보를 입수하고 침묵에 들어갔다. 전남대를 비롯한 광주지역 대학생들은 계엄령이 내려지면 전남대에 모여 시위를 계속하기로 약속하고 16일(금요일) 밤 평화롭게 횃불시위를 마쳤다. 한편 여야 정치인들은 5월 20일 국회를 개원하여 헌법을 개정하기로 합의했고, 기자들은 이날부터 언론검열을 거부하기로 했다. 위기감을 느낀 전두환 신군부는 5월 17일 밤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선포하고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을 비롯해 다수의 정치인들을 연행 및 감금하고 정치활동 금지조치를 내렸다.

5월 18일(일요일), 계엄령 확대와 김대중 연행사실이 알려지자 전남대생들은 약속했던대로 캠퍼스로 몰려왔다. 그러나 이미 공수부대가 점령하여 학교 진입이 어려워지자 시내로 나와 곳곳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 2시 이후 공수부대가 광주시내에 투입되어 살인적인 진압작전을 펴면서 ‘피의 광주’가 시작되었다.

1980년 5월에 광주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가 기자협회보에 게재한 체험담을 보면 계엄군 잔학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5월 18일 오후 2시 광주일고 앞 금남로에서 최초로 시내 진압에 나선 공수대원들이 대검을 던지고 지나가는 버스를 세워 젊은이라면 무조건 두들겨 패고 끌어내 연행하는 것을 보고 나는 다른 시위대와 함께 인근 건물 3층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러한 만행을 지켜본 건물 안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욕설을 퍼붓자 이번에는 닫혔던 셔터문을 부수고 들어와 방마다 점검하기 시작했다. 옆방에까지 쳐들어와 두들겨 패면서 비명소리가 나자 극도로 공포에 질렸다. 다행히 계엄군이 후퇴해 피해를 모면했지만 그 공포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한 기자는 공수대원에게 쫓겨 추락위험을 무릅쓰고 건물 옥상의 광고 철탑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 피신해야만 했다. 또 다른 기자는 자신이 KBS 기자임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공수대원은 손을 머리 위로 올리도록 하고 “나는 공산당이다”“나는 공산당이다”를 복창하도록 하면서 연행해 갔다’

3개 공수여단이 광주의 젊은이들에게 무참히 폭력을 휘두르고 옷을 벗겨 연행해 가자 흥분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게 됐고, 공수부대는 집단발포를 하기에 이르렀다.

軍權 바탕으로 지역차별·반인륜적 통치

1980년 당시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자 중앙정부보장 서리에 앉아 국방부와 육본의 각종 모임에 참석하면서 지휘를 하였고, 광주에 파견된 부대장에게 금일봉을 보내며 진압을 격려하였다. 계엄군 1만명의 병력이 시민군의 지휘부였던 전남도청을 새벽을 틈타 헬기사격 등으로 유혈점거하자 그 직후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군인들을 대거 등용했다. 8월에는 형식적인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를 끌어내리고 9월에 체육관 선거를 통해 자신이 대통령 자리를 꿰찼다. 자신을 중심으로 헌법을 개정하고 군과 정보기관 장악력을 바탕으로 사회정화운동, 삼청교육대, 공무원 사정 등 폭압적인 통치로 정부를 이끌었다.

하여 이후 7년간은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암울한 사회가 지속되었다. 겉으로는 정의사회를 구현하겠다고 하고서 재벌들로부터 뇌물을 긁어모아 주변의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며 내란죄 공격에 대비한 방탄벽을 둘러쳤다. 인재의 차별등용도 심해졌다.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국민의 항거가 계속되자 보안대 안기부(중앙정보부 후신) 등 정보기관을 통한 탄압과 편가르기로 불신을 조성했다. 광주에서는 망월동 구묘역에서 해마다 추모제가 열리자 유족들에게 돈을 주어 묘를 이장하는 반인륜적인 공작을 펴기도 했다.

全은 반란군 수괴, 뇌물죄, 추징금 미납, 명예훼손 유죄

1987년부터 시작된 국회 청문회, 1988년 노태우 정부의 민화위 구성이 있었으나 5·18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전두환의 백담사행이라는 일시적 조치로 마무리 하려했다. 1993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문민정부는 5·18을 기반으로 한 정권”이라고 천명했지만 5·18 관련자들이 고소고발한 사건에 대해 검찰은 1995년 7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묻어버렸다. 1995년 11월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검찰에 특별수사본부가 구성돼 두 명의 전 대통령과 12·12 및 5·18과 관련된 신군부 인사들이 그제서야 재판을 받게 되었다. 1997년 4월, 대법원은 전두환에게 내란목적살인, 뇌물수수 등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했으나 이 해 12월 특별사면을 받음으로써 뻔뻔하게 자유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전두환은 이렇게 하여 내란을 일으킨 반란군의 수괴이자 권력을 배경으로 재벌들로부터 수천억원을 뜯어낸 형사범이 됐다. 전직 대통령 명예도, 훈장도 박탈당했으며, 추징금을 내지 않고, 명예훼손으로 1심에서 형을 선고받기까지 한 현행범이기도 하다. 더 중요한 것은 무력집권으로 우리나라 민주화를 늦추게 한 역사적 죄인이 됐다는 점이다.

41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5·18문제가 명쾌하게 정리되지 못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때문이었다. 첫째, 1987년과 1988년 국회 청문회 이후 결과보고서를 채택하고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져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집권 민정당 거부로 유야무야 됐고, 둘째,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라고 하여 방치함으로써 그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했고, 셋째, 12·12 내란에만 수사를 집중하고 헬기사격, 집단발포 등 5·18 범죄에 대한 수사는 충실히 하지 않았고, 넷째, 전두환·노태우의 사면이 국민에게 ‘죄없음’으로 보이도록 했다는 점에 있었다.

하여 지금도 5·18에 대한 왜곡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20대 국회에서는 현역 국회의원들이 5·18진압을 합리화하고, 피해자들을 비방하였다. 해당 정당은 형식적 처벌만 하였다. 북한군 600명 침투설이 사실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한 대학의 교수가 강단에서 버젓이 이를 소개하여 비난받았다. 윤 전 총장도 자기 당의 대표가 “전두환 시대에는 정치는 없고 통치만 있었다”고 말한 것과는 배치(背馳)되게 그를 칭찬했다.

국가보고서 채택해 ‘피땀으로 얻은 민주주의’ 각인을

현재 활동 중인 5·18민주화운동진상조사위원회는 이런 잘못된 역사적 시각을 마지막으로, 제대로 정리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결성되었다. 암매장과 사망자 숫자, 헬기사격, 집단발포, 성범죄 등이 밝혀지고 그 결과가 조사보고서로 국회에서 채택된다면 5·18과 전두환 등에 대한 긍정적인 오해는 풀어지게 될 것이다. 교과서나 언론에 ‘신군부’라는 명칭이 ‘반란군부’로 제대로 불러지면 상관의 지시로 광주에 갔다가 정신적 상처를 입었던 하위 장병들도 트라우마를 벗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1980년부터 1997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될 때까지 광주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똘똘 뭉쳐 엄청나게 많은 희생과 피와 땀을 흘려가며 투쟁한 결과로 쟁취한 것이다. 5·18을 오해하거나 왜곡을 일삼는 자들까지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민주주의가 이처럼 쟁취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재인식하게 된다면 이번과 같은 헛소리는 더이상 나오지 않게 될 것이다.

김 성(지역활성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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