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푸른 삶을 살고자 한다면

영원히 푸른 삶을 살고자 한다면

  • 기자명 김삼웅 논설고문
  • 입력 2021.10.2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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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많이 퇴색했지만 한때 세계적인 명문으로 알려진 미국 하버드대학의 초대 나담 푸시 총장이 학생들에게 훈시한 내용이 지금도 이 대학의 전시실에 남아서 많은 재학생들에게 감동을 준다.

나담 푸시는 “젊은이들이여! 그리고 젊은이들처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여! 영원히 푸른 삶을 살고자 한다면 죽을 때까지 3가지를 간직하여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영원히 흔들 수 있는 깃발을 만들어라.

둘째, 죽을 때까지 지킬 수 있는 신조를 준비해라.

셋째, 평생을 두고 부를 수 있는 노래를 가져라.

별로 어려운 조건은 아닌 것 같다. ‘깃발’이야 꼭 무슨 이념이나 철학상의 깃발이 아니면 어떤가.

유치환의 시 ‘깃발’의 한 연이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자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조처럼 날개를 펴다

아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아는 그는.”

‘신조’ 역시 마찬가지이다. 의롭고 성실하게 살고자 하는 신념이어도 무방할 것이다.

신조 또는 신념과 관련 마하트마 간디의 말은 시효를 넘어섰다. “내가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서 나와 가장 가깝고 또 친한 사람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을 때, 공개적으로 나의 신념을 천명하지 않는다면, 나는 진실하지 못하고 비겁한 사람이 되어버릴 것이다.”

동양의 고전 ‘해근담’이다.

“아무리 여러 사람의 반대가 있어도 너의 양심에 옳다고 느껴지거든 단연코 하라! 남이 반대한다고 자기의 신념을 꺾지는 말라! 때로는 그와 같은 의지와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또 자기의 의견과 같지 않다고 남의 생각을 함부로 물리쳐서는 안 된다. 옳은 말은 누구의 말이고 귀를 기울이며 그 의견을 채택할 만한 아량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올 이익이나 은혜를 미끼 삼아 대의명분과 커다란 이익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 옳은 말은 누구의 말이고 귀를 기울이며 그 의견을 채택할 만한 아량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올 이익이나 은혜를 미끼 삼아 대의명분과 커다란 이익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 또 여론을 이용해서 자기의 감정이나 기분을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기울어지지 말아야 한다.”

‘노래’는 더욱 쉬울 것이다. 김민기의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 이래도 괜찮을 것이다. 어떤 이는 가정 행사에 전가족이 모여 애국가를 4절까지 합창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라면 모를까 지금은 아니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길 멀고 험해도.”(김민기 작사 작곡)

나담 푸시 총장이 제시한 것은 내세우는 가치보다 이를 지키려고 하는 의지와 실천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평범한 사람들이 ‘깃발’을 만들고 ‘신조’를 준비하고 ‘노래’를, 그것도 평생을 두고 부를 노래를 마련하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것도 하버드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총장의 제안이라면 좀 더 무겁고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있을 법도 하다.

실제로 인류사에서 굵직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설정한 이상과 가치를 추구하면서 생애를 보낸 인물들이다. 한 마디로 일관하여 ‘한 우물’을 판 사람들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헤겔의 변증법, 칸트의 이성, 다윈의 진화론,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니체의 절대자, 베르그송의 직관, 피히테의 자아, 듀이의 경험론, 제임스의 의식의 흐름, 프로이드의 무의식, 포드의 자동차, 간디의 비폭력, 김구의 독립운동, 함석헌의 씨알, 임종국의 친일파, 최명희의 혼불…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이들은 자신이 설정한 가치를 추구하면서 생애를 보내고, 이를 통해 문명사에 샛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중국 남조시대 양나라의 화가 장승요는 산수화와 금수화를 특히 잘 그렸다. 그의 매그림이 마치 살아있는 듯하여 비둘기가 앉으려다 놀라 달아났다고 한다. 안락사란 절에 네 마리의 백룡 벽화를 그렸는데 그 중 두 마리는 눈동자에 점을 찍자 곧 하늘로 날아갔다고 전한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고사는 이로부터 생겼다.

당나라의 화가 오도현은 궁중화가로서 인물화와 산수화에 특히 능했다. 당대인들이 그를 화성(畵聖)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어느날 그는 자신이 그린 산수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는 전설이 남는다.

신라의 화성 솔거는 황룡사에 노송도(老松圖)를 그렸는데 얼마나 실감나게 그렸던지 새들이 몰라보고 날아들다가 벽에 부딪혔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판소리 명창 이날치는 걸걸한 목소리인 수리성으로 울리고 웃기면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가 새타령을 부르면 새들이 몰려와 어깨와 손바닥에 앉았다고 전한다.

웬일로 신화나 전설 같은 얘기만 하느냐고 힐난할 지 모르겠다. ‘한 우물’을 파는 장인정신이 필요하기에 하는 말이다. 세상이 다원화되면서 한 우물을 파는 사람이 드물다. 설렁탕 장사를 하다가 돈을 벌면 불고기집을 내고, 마늘 농사가 된다 하면 너도나도 마늘을 심는다. 결국 함께 망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세파가 변덕스럽고 세심(世心)이 요망스러워지면서 사람 사귀기가 쉽지 않은 세태가 되었다. 이해가 겹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정직이나 성실만으로는 자신의 깃발과 신조, 노래를 부르며 살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나날이 변해가는 탈산업사회에서 한 우물 파기나 장인정신 역시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세속의 권세나 물욕 명예 따위는 뜬구름 같은 것에 불과할 지 모른다. 수의(壽衣)에 주머니가 없는 것처럼 죽을 때는 모두 빈손으로 떠난다. 부질없는 탐욕과 허영 때문에 일회성의 소중한 삶을 탕진하기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가정과 업무에 충실하면서 나름의 깃발과 신조와 노래를 부르며, 기왕이면 한 우물을 파고 장인정신으로 고집스럽게 사는 것도 보람 있는 생애가 아닐까.

영어의 행복이란 단어 ‘happiness’는 본시 옳은 일이 자신 속에서 일어난다는 뜻을 지닌 ‘happen’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바르게 사는 사람들의 작은 행복을 위해 에머슨의 시 한 편을 나누고 싶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 받는 것

정직한 이웃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을 발견하는 것.

-무엇이 성공인가- 중에서

김삼웅(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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