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 칼럼> 여순사건 진상규명과 대선주자의 ‘미 점령군 논란’

<김주언 칼럼> 여순사건 진상규명과 대선주자의 ‘미 점령군 논란’

  • 기자명 김주언 논설주간
  • 입력 2021.07.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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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이념대결의 장으로 남아 있다.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미군정을 거쳐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질곡의 현대사는 민족의 아픔으로 남아 있다. 죄없는 양민이 이념갈등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집권세력은 양민학살을 공산세력폭동 진압으로 왜곡했다. 그로부터 70여년이 지나면서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규명이 추진되고 있다. 국회에서 제주4.3특별법이 전면 개정된 데 이어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됐다. 이제야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해방직후 미군정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때아닌 대선주자들의 이념논쟁으로 등장했다. 최근 정치참여를 선언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이념논쟁과 색깔론에 불을 붙이고 나섰다. “친일세력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지배체제를 유지했다”는 이재명 경기지사의 발언에 대한 윤 전 총장의 비난은 전형적 ‘빨간색 칠하기’로밖에 볼 수 없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잘못된 이념을 추종하는 국가로 탈바꿈시키려 한다”는 주장은 극우세력인 ‘태극기집단’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 
윤 전 총장은 페이스북에 “셀프역사 왜곡,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는 “광복회장의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라는 황당무계한 망언을 집권세력의 차기 유력후보 이재명 지사도 이어받았다”며 “대한민국을 잘못된 이념을 추종하는 국가로 탈바꿈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역사의 단편만을 부각해 맥락을 무시하는 세력은 국민의 성취에 기생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이를 ‘좌파세력 재집권 음모’라고까지 주장하고 나섰다. 
이 지사는 경북 안동 이육사문학관을 찾아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의 정부수립 단계와는 달라서 친일청산을 못하고 친일세력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다시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라고 말했다. 윤 전 총장은 발언의 맥락을 무시하고 엉뚱하게 왜곡해 색깔론을 들이민 것이다. 이 지사는 “윤석열 전 총장의 구태 색깔공세가 안타깝다”고 반박했다. 미군의 포고령에도 점령군임이 명시되어 있고, 이승만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도 점령군이라는 표현을 공식적으로 사용했을 뿐 아니라, 미군이 점령군임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지적이다. 
1945년 9월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며 발표한 맥아더 포고령 1호는 다음과 같다. ‘제1조 :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정부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나의 관할을 받는다. 제3조 : 모든 사람은 즉시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 아래 발표하는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점령부대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의 안녕에 방해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형식적으로라도 ‘해방군’으로 행세했던 소련군과 달리, 미군은 스스로 ‘점령군’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건준(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해서도 미군정은 전면부인, 소련은 인정 형태를 띠었다. 미군은 일제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았던 건준을 해체했다. 건준은 1945년 8월15일부터 9월7일까지 독립운동가 여운형 안재홍 등이 일본으로부터 행정권 등을 인수받기 위하여 만들어진 조직이다.  북에서는 조만식 등이 주축이 돼 활동했다. 미군정은 1919년 4월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해체를 선언했다. 이에 따라 임정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김구선생은 해방후 3개월이 지난 11월 23일 개인자격으로 환국했다.  
해방직후 한반도 38도선 북쪽에 진주한 소련의 목표가 친소 좌파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듯이 미국의 목표는 남한에 친미 우파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한의 상황은 달랐다. 1946년 8월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자본주의 지지자는 14%에 불과한 반면, 70%는 사회주의, 7%가 공산주의를 지지했다. 미국은 77%에 달하는 좌파지향적 민중을 무력화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친일관료들을 중용했다. 미군정은 1946년 대구 10월항쟁에 이은 전국적 ‘추수봉기’를 친일경찰 등을 동원해 진압하고 극우세력이 자리잡도록 만들었다.
미군정 말기에 일어난 ‘제주4·3’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일어났다. 이승만은 친일경찰과 서북청년단을 동원해 강제진압에 나섰다. 제주 산간마을이 초토화하고 수많은 양민이 학살됐다. 전남 여수에 주둔 중이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4·3 진압명령에 반대하며 일으킨 사건이 여순사건이다. 당시 희생자만 1만여명이 넘는다. 1949년 전라남도가 3차례 피해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만1131명이 사망했다. 여수와 순천 등지에서 무력으로 충돌하면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집단으로 희생된 것이다. 
여순사건의 원인이 된 제주4·3은 2000년 특별법이 제정됐다. 2014년부터는 국가추념일로 지정됐다. 지난 3월엔 4·3특별법이 배상 및 보상 근거규정을 두도록 전면 개정됐다.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거창사건과 노근리사건도 특별법을 통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진행중이다. 그러나 여순사건은 16~20대 국회에서 4차례 특별법이 발의됐으나 번번이 회기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이제 73년만에 여야 합의로 지난달 29일 국회문턱을 넘어섰다. 
여순사건의 실체적 진실규명이나 인명피해규모 파악,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이승만정권은 여순사건 발발이후 반공주의를 강화했다. 정부에 반대하거나  잠재적 비판세력은 적으로 간주됐다. 이들은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국가보안법이 탄생한 것이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진 뒤 1960년 국회에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가 구성됐지만 이듬해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정권에 의해 유야무야됐다. 이후 피해자와 희생자 유족은 반공이데올로기에 눌려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그동안 여순사건을 말하면 ‘용공주의자’ 또는 ‘빨갱이’로 몰렸다. 여순사건 이후 대대적 숙군작업에 협조한 박정희는 살아 남았다. 박정희는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이를 감추기 위해 빨갱이 탄압에 더욱 열을 올렸다. 유족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혀 남몰래 제사를 지내는 등 통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오랜 세월 침묵을 지켜왔던 유족은 1998년에야 여순사건 50주기 행사를 치렀다. 암매장당한 희생자들 발굴작업도 벌였다. 
2005년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는 2010년까지 여순관련 사건 730건을 신청받아 712건을 처리했다. 하지만 신청사건 위주로 조사가 진행돼 전반적 피해상황 파악은 어려웠다. 관련자료가 사라져 진상조사가 마무리되지 못했다. 희생자 유족은 과거사위 조사결과를 토대로 재심을 청구해 2019년 3월 대법원이 받아들였다.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지난해 9명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지난해 10월 추모제에는 처음으로 민간인과 경찰 희생자 유족이 참석해 화해했다. 
여순사건 특별법은 국무총리 소속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가 진상규명에 나서도록 했다. 전남지사 소속 실무위원회는 진상규명 신고를 접수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심사결정과 의료지원금 및 생활지원금 집행 등을 맡는다. 여수시는 여순사건 기념공원을 만들기 위해 부지를 물색하고 있다. 순천시는 집단학살지인 낙안 신전마을 금산분교를 ‘추모의 숲’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여순사건은 이제 ‘반란사건’이란 꼬리를 떼어낼 수 있게 됐다. ‘제주4·3’도 이제 올바른 이름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로 진상이 규명된 미군정의 ‘점령군 논란’이 새로운 색깔론으로 등장했다. 역사의 흐름을 거꾸로 돌려 놓으려는 철지난 색깔론이다. 유력 대선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왜곡된 역사의식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극우세력의 전형적 행태와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김주언(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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