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의 관풍(觀風)> 우리 주변엔 ‘역사 왜곡’ 없을까

<김성의 관풍(觀風)> 우리 주변엔 ‘역사 왜곡’ 없을까

  • 기자명 김성 소장
  • 입력 2021.03.04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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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지어 교수 논문 왜곡 사건 계기로 되돌아 봐야

역사의 왜곡이 인류사회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준 게 최근에 벌어진 램지어 교수의 논문 왜곡 사건이었다. 또 우리가 어떻게 이런 일에 대처해야 할것인가를 보여 준 좋은 계기가 됐다고 본다.

일본, 미국 학자 논문 빌어 ‘성노예’ 왜곡하려 시도

지난 1월 28일 일본의 우익 성향 산케이(産經)신문이 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태평양전쟁 당시 성(性)계약'(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이라는 제목의 논문 요약본을 게재했다. 이 논문의 핵심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과 일본군 사이에는 서로의 이익을 위해 계약을 맺은 것이지 일본 정부나 조선총독부가 모집업자들을 동원해 어린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0세의 일본인 소녀가 자발적으로 계약서를 작성한 것을 예로 들었다. 그러니까 조선 여성을 포함한 일본군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한 ‘매춘부’였다는 것이다. 산께이 신문은 위안부가 성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기 때문에 의의가 크며, 특히 일본군이 조선의 여성들을 성노예로 삼았다는 잘못된 이미지도 개선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 글은 3월 발행될 국제학술지에 실릴 예정이다.

램지어 교수 논문 내용이 보도되자 하버드대학 한국인 유학생들부터 시작하여 하버드대 학부 학생회, 미국 한국인 여성단체, 한국과 일본, 아시아의 시민단체들까지 논문 철회와 함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고, 3천여명의 교수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까지 “매우 불성실한 논문”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조선인 위안부 계약서 제시못하고, 소녀 고백도 왜곡

같은 하버드대 로스쿨 종신교수인 한국계 석지영 교수와의 이메일 교신을 통해 그의 논문에 심각한 허점이 드러났다. 우선 조선인 여성의 매춘 계약서를 제시하지 못해 신뢰성을 상실했다. 또 에이미 스탠리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 등은 램지어 교수가 인용한 원서를 보면 실제로 오사키라는 10세 소녀는 “우리는 이런 업무일 줄 모르고 있었다. 믿기 어려울 만큼 끔찍했다”고 증언한 것으로 돼 있다고 반박했다.

일본의 도쓰카 변호사는 1932년 재판의 예를 들었다. 당시 일본인 여성 15명이 배로 중국 상하이(上海)로 보내진 후 ‘해군 지정 위안소’에서 당시 일본 해군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강요당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인 10명이 기소돼 1936년 11월 1심에서 유죄 판결이 내려졌고 상급심에서 형량이 줄긴 했으나 판결의 취지는 유지됐다고 밝혔다. 1심 판결에서는 피해자들이 일본군 위안부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속아서 나가사키에서 유괴돼 중국으로 보내졌다고 규정했다. 당시 일본 형법으로는 유괴였으므로 일본 열도 내에서 이런 식으로 여성들을 속여서 동원하기가 쉽지 않게 되자 한반도에서 총독부나 경찰과 협력하여 동원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조선 피해자들의 증언도 비슷했었다고 덧붙였다. 도쓰카 변호사는 하여 “램지어 교수의 논문은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학술논문으로서 기본도 갖추지 않아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오해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UN이 ‘성노예’로 공식화…독일 ‘홀로코스트’와 맞먹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 당시는 물론 그 이후에도 이슈가 되지 않다가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용기를 내어 폭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를 일관되게 부인해오던 일본 정부는 1993년 8월 고노담화를 통해 조선 여성들의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했고, 1995년 8월 일본 총리 무라야마도 전쟁 중 일어났던 악행들에 대해 포괄적으로 사과(무라야마담화)함으로써 사실로 굳어졌다. UN도 2개의 보고서(1996년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1998년 맥두걸 보고서)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는 성노예였음을 확인하고, 일본 정부의 후속조치를 요구했다. 그때부터 ‘성노예’라는 단어가 공식화되었다. 2000년 12월에는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 여성단체와 위안부 할머니들까지 일본 도쿄에 모여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 법정’을 열어 히로히토 전 일본 국왕 등 9명과 일본 정부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강제성이 부여된 것은 아니지만 여성시민단체로서는 대단히 큰 성과였다.

위안부(慰安婦, comfort woman)는 전쟁범죄를 축소하려는 일본의 왜곡된 표현이며, 매춘부(賣春婦, prostitute)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성의 계약관계 개념이다. 반면 성노예(性奴隸, sexual slavery)는 보다 확실한 강압적이고 반인권적 개념이다. 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독일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와 함께 2차 대전 중 가장 큰 인권침해사례로 꼽히고 있다. 일본은 사죄보다는 ‘기억 지우기’에 더 매달렸다. 이 논문도 일본 정부와 우익단체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유아 성폭행과 성매매 같은 여성들의 인권침해 사례를 합리화하려 했는데 이마저 자료부실이었다는 지적을 받게 된 것이다.

국제 로비 통해 ‘사죄·반성’보다 ‘기억지우기’에 주력

그동안 일본은 국제적인 로비활동으로 ‘침략국가’‘성범죄국가’라는 ‘오명’을 벗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여성 인권훼손의 상징으로 세계 곳곳에 세워지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방해하였으며, 나아가 학술분야에까지 경제적 지원을 미끼로 ‘역사 왜곡’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우리나라에서 제기된 식민지 산업화론, 반일 민족주의 같은 학술적 친일화 성격도 이와 관련이 있는지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일관계가 정치적으로는 회복되더라도 그들이 진실되고 지속적인 사과와 반성을 하지 않는 한 실체적 진실 추적은 소홀히 해선 안된다.

일본은 큰 역사적 흐름으로 볼 때 한국문화의 수혜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과 한일합병이라는 두 차례에 걸친 침략행위를 저질렀고, 아시아 지역 평화를 뒤흔드는 명일전쟁(임진왜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주역이기도 했다. 그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의 후방 군수산업기지로 경제성장의 기반을 잡았고, 1951년(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패전국인 주제에 ‘반공 방파제’의 필요성 때문에 운좋게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다. 그리고 경제선진국이 되면서 ‘사죄·반성’은 덮어두고 ‘긍지’만 국민에게 심어주었다. 1950년대부터 지루하게 진행된 한일청구권협상에서도 “조선에 뇌두고 온 일본인 재산액수가 더 많다”는 등으로 한국을 농락했고, 독립운동가 출신이었다는 이유로 이승만 정권을 배척한 뒤, 일본 육사출신 박정희가 집권하자 협약을 체결했다.

‘국가면제’ 조항 때문에 국제사법재판소 결과 예측 어려워

1980년대 이후 일본 내 우익단체들에 의해 역사교과서를 왜곡하면서 일본 정부는 우경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8년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일본 수상이 함께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 공동선언’을 발표하기까지 했으나 그 이후로도 전범기업 노동자들과 정신대 보상, 일본군 위안부 사과, 역사 교과서 우경화 문제 등으로 정치적인 갈등이 계속됐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상으로 국가와 개인의 모든 채무관계는 끝났다는 주장이다. 반면 우리 법원은 개인에 대한 청구권은 유효하다는 입장이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문제는 청구권협상 타결 이후 드러난 사건으로 반인권적 행위라는 국제적 비판이 거세지자 일본은 별도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부심했다. 이런 와중에 박근혜 정권이 위안부 당사자의 의견을 듣거나 후폭풍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본의 꾀임에 속아 넘어가 2015년 12월 28일 10억엔 기금을 조건으로 덜컥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발표하고 말았다. 이후 집권한 문재인 정권이 이 합의를 취소하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박정희 부녀가 두 차례에 걸쳐 각각 ‘미숙성 합의’를 한 결과를 빚었고, 일본은 한국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포함한 전반적인 보상이 끝났다는 주장을 하게 만들었다.

이용수 할머니 등 한국사회 일부에서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청구권 합의안의 모호한 문귀해석과 국제법상의 ‘국가면제’(다른 국가 및 그 재산에 대한 관할면제) 때문에 불리할 수 있어 여기까지 나가지 않고 있다. 일본 역시 한국측 제소에 대응했다간 또다시 국제적 비난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위안부·월남전·한국전·학생독립운동에 잘못된 역사 남아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과연 지난 역사에서 왜곡이 없었으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 해왔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도 감추기만 할 수 없는 과오가 있었다.

단적인 예로 위안부 문제에서도 민족적 분노의 외침은 높았으나 연구지원 같은 조치는 소홀히 해 가해자측과 비교해 학문적 성과로는 크게 뒤떨어져 있다. 겨우 41년 전에 있었던 5·18을 북한군 특수부대가 주도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구체적인 근거도 없으면서 끊임없이 이를 주장함으로써 결국 시민과 진압군이 함께 잘못을 저질렀다고 조작, 역사에 ‘양비론’으로 남기려 하고 있다. 따라서 왜곡된 역사가 남겨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1960~1970년대 월남전에서 한국군이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서 진상을 밝히고 베트남에 사과해야 한다. 인권존중 국가로서 1회성 사과가 아니라 끊임없이 물질적 정신적 사과를 해 한일관계처럼 불행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한다. 부끄럽게 우리나라에도 한때 위안부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었던 일부 한국군 고위장교들이 일본군의 나쁜 행태를 본받아 1950년 한국전쟁 때 위안소를 운영했었다. 이런 사실도 고백하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 그래야 일본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가질 수 있다. 1929년 전국에서 일어난 학생독립운동도 일제에 의해 ‘댕기머리 사건’‘사회주의자의 맹동’으로 축소됐다. 광주, 서울, 부산 등 전국 각지에 조직된 비밀결사들에 의해 320개 학교와 지역사회가 독립운동에 나섰으나 광복 이후 자세히 조사되지 않아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고, 독립유공자도 소수에 불과하다.

이들 사건들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는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에 굳혀질지 모르는 ‘왜곡’을 막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정부와 학계는 끊임없이 적극적인 규명에 나서야 한다.

‘한류’ 등으로 일본국민 설득 … 인류평화에 동참시켜야

앞으로의 과제는 일본 국민이 올바른 사고(思考)를 갖도록 변화시키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일본인들은 다른나라 여성들을 강제로 ‘처녀공출’했다는 사실을 모를 뿐만 아니라 ‘패전(敗戰)’이란 표현을 적극 피하고 ‘종전(終戰)’만 강조된 교육을 받아서 과거 일본이 ‘전쟁도발자’였다는 사실도 망각해 가고 있다. 전쟁 책임은 밝히지 않고 세계 유일의 ‘원폭 피해국’이라는 점만 강조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 의회가 성노예에 대해 사과 및 후속조치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한 사실도 대부분 모르고 있다. 우익이 앞장서서 잘못을 조장하다 보니 일본 국민은 일말의 반성보다는 잘못된 긍지만 갖게 되었다. 이제 일본 정부나 정치지도자들이 사죄와 반성, 인권국가로 나아가는 국민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는다면 외부에서 이들에게 ‘팩트’를 알려주어 반성하도록 해야 한다. 민족적 ‘외침’하나만 내세울 게 아니라 우리의 장점인 한류의 다양한 장르를 통해 인류평화에 동참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광주의 5·18기념재단으로부터 벤치마킹할 부분도 있다. 아시아지역 청년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민주화와 관련된 워크숍을 해마다 개최해 오고 있는 점이다. 이 활동가들은 이제 나라별로 또는 이웃국 활동가들과 연대하여 민주화와 관련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일 청년들이 함께 워크숍을 통해 마음과 마음으로 어깨동무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김성( 지역활성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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