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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언 칼럼> ‘장산곶매’가 되어 하늘에 오른 백기완선생
  • 김주언 논설주간 newmedia54@dailysportshankook.com
  • 승인 2021.02.18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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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 앞 마당에서 백기완 선생 추모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고 백기완선생은 영원한 ‘민중의 벗’이자 ‘거리의 투사’였다.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성성한 백발을 휘날리며 사자후를 토하던 한복차림의 백선생 모습을 볼 수 없게 돼 서글프기만 하다. 백선생은 이라크파병 반대 집회, 용산참사 투쟁,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 국정원 댓글사건 규탄 시국회의, 백남기농민 사망 투쟁, 박근혜탄핵 촛불집회 등 투쟁현장의 맨 앞자리를 지킨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가 선두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집회의 열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백선생은 하늘에 오른 장산곶매처럼 겨레를 지켜줄 것이다.
백선생이 들려준 장산곶매 이야기는 많은 이의 가슴 속에 새겨져 있다.

“황해도 구월산 줄기가 바다를 향해 쭉 뻗다가 뚝 끊어진 곳에 장산곶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장산곶 숲속에 날짐승 중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매가 살았는데 그중 으뜸인 장수매를 장산곶매라고 한다. 이놈은 일년에 두번 대륙으로 사냥을 나가는데 떠나기 전날밤 부리질로 자기 둥지를 부수어낸다. 자신의 마지막 안식처까지 부수며 정신상황을 점검했던 것이다.
대륙에서 독수리가 쳐들어와서 온 동네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이 기운이 빠져 우는데 장산곶매가 날아올랐다. 독수리는 큰 날개를 한번 휘두르면 회오리가 일어날 지경이었고, 장산곶매는 형편없이 작아 보였다. 싸움은 밤새 계속되었다. 장산곶매는 그놈의 가슴팍을 파고들어 날갯죽지를 쪼아버렸다. 그놈은 힘을 못쓰고 땅으로 곤두박질을 치고 말았다. 장산곶매가 낙락장송 위에 앉아 지친 몸을 쉬고 있을 때 큰 구렁이가 나무를 감고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장산곶매는 구렁이가 덤비는 순간 들고 있던 한쪽 발로 구렁이의 눈을 공격하고 그놈이 휘청거릴 때 부리로 머리통을 쪼아버렸다. 마을사람들이 기뻐 함성을 올리는 순간 장산곶매는 하늘로 힘차게 날아 올랐다. 그때 동편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며 마을에는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였다.”
백선생은 1933년 1월24일 황해도 은율 구월산 밑자락에서 태어났다. 1945년 해방뒤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내려왔다.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가족도 남북으로 나뉘어 살게 됐고 갈라진 집안을 잇겠다는 일념으로 통일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1960년 4·19혁명에 뛰어들면서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나섰다. 1964년에는 함석헌선생, 장준하선생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나섰다.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장선생과 함께 긴급조치위반으로 구속됐다. 이후 YMCA 위장결혼식 사건과 부천서 성고문진상 폭로대회를 주도해 옥고를 치렀다. 그의 몸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백선생은 ‘장산곶매 이야기’ 등 소설과 10여권의 수필집과 시집을 낸 문인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 원작자로 알려져 있다.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주도혐의로 옥고를 치른 백선생은 후일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로 쓰이는 장편시 묏비나리를 썼다.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소설가 황석영씨가 묏비나리의 구절을 일부 빌어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를 썼다. 백선생은 우리말에 애착을 가졌다. 백선생과 말을 나누려면 반드시 우리말을 챙겨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호통이 쏟아진다. 식사는 ‘밥’으로 한평생은 ‘한살매’으로 써야 했다. 
백선생과 필자의 인연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선생은 통일문제연구소의 전신인 백범연구소를 꾸리고 있었다. 당시 친구들과 함께 백범연구소를 기웃거렸다. 장준하선생이 약사봉에서 사망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백선생과 함께 장선생의 시신이 발견된 곳을 찾아갔다. 장마 직후 개울물이 불어나 어렵사리 현장을 찾았다. 백선생은 현장을 둘러보며 장선생의 죽음은 단순 실족사가 아닌 타살임을 설명했다. 백선생과 장선생은 떼어놓을 수 없는 동지였다는 기억이 남아 있다.
대학시절 출간된 백선생의 책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는 당시 남녀 대학생의 필독서였다. 백선생의 맏딸 원담(현 성공회대 교수)에게 들려주는 편지글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담아, 네가 쓰고자 하는 시가 장수매의 부리질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느냐. 자기 둥지를 깨서 삶의 정의를 새롭게 다지는 소리로 하여 잠든 사람, 병든 사람을 일으키는 부리질 말이다. 자기 둥지란 오욕의 역사다. 침략주의와 앞잡이들의 문화요, 그것에 오염된 문화경험이다. 역사의 합리적 발전지향에 대립되는 쩨쩨한 소시민의식이요, 개인의 명예와 욕심이다. 따라서 민족의 자주통일에 대립되는 일체의 분단적 또는 보수적 가치관이다.
이제부터 네가 내뱉는 수작은 모두 너의 둥지를 부수는 부리질이어야 하지 않겠느냐. 너 자신을 일깨우고 이땅의 해방을 일깨우는 부리질, 세계의 해방을 울부짖고, 세계의 전진을 재촉하는 부리질, 밤새도록 둥지를 깨고 아직 동이 트기 전, 황금빛 새벽하늘을 매처럼 치솟아 오를 때 이땅에 사는 모든 약한 사람, 병든 사람들은 말할 나위도 없고, 세계의 모든 길 잃은 사람들이 장산곶 사람들처럼 자기 길을 찾아 나서게 하는 부리질, 네 주둥이가 헐어 터지도록, 딱딱 까는 장엄한 소리를 아버지는 듣고 싶은 것이다.“
백선생은 책에서 전통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여겨온 여인상들을 준엄하게 비판한다. ‘부잣집 맏며느릿감’은 부잣집의 재산과 머슴과 노비와 소작인까지 잘 관리하여 시아비의 재산을 늘려 주어야 하는 사람이다. 고전 속 ‘춘향’이는 입신출세의 관리인 암행어사에 의해 해방되어 지배체제에 흡수된 수동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백선생이 그리는 여인상은 ‘잘 먹고 잘 입는 영양상태’로 다듬어진 철없는 여인이 아니라,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기름진 초원을 달려가’ ‘장수말을 정복’하는 힘찬 기상의 여인이다. 
백선생과의 인연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대학로에 마련된 통일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서 백선생은 특유의 호방한 목소리로 가르침을 주었다. 광화문 등 집회에서 마주칠 때면 반갑게 손을 잡으며 어깨를 특툭 쳐주던 인자함도 잊히지 않는다. 선생은 언론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언론단체 행사에 참석해 언론의 고질적 병폐를 들춰내며 언론인들을 꾸짖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수많은 집회에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강조하던 선생의 뚝심은 본받아야 할 자세이다.
백선생의 사상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노나메기 세상’이다. ‘너도 나도 잘 사는 세상’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백선생이 병상에서 쓴 ‘버선발 이야기’에 잘 드러나 있다. 버선발은 맨발을 말한다. “야 이놈들아, 남의 목숨인 박땀, 안간 땀, 피땀만 뺏어먹으려 들지 말고 너도 사람이라고 하면 너도나도 다함께 박땀, 안간 땀, 피땀을 흘리자. 그리하여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벗나래(세상)를 만들자.” 백선생은 “다같이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거. 그게 바로 노나메기”라고 말한다.
“요새야 통일이란 말이 유행을 지나 한물간 지경이지만, 백범선생이 비명에 가신 이후로 ‘통’자도 함부로 내뱉지 못하지 않았어? 그렇다고 나만 잘나서 통일, 통일 노래한다는 게 아냐. 통일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이뤄야 할 ‘목숨’ 같은 거야.” 백선생은 평생소원인 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의 통일에 대한 염원은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있다. 하늘로 올라 황해도 고향마을 장산곶을 바라보는 ‘장산곶매’, 백선생의 화신인 장산곶매는 지금도 노나메기와 통일을 위해 자기 둥지를 부수어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김주언(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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