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바람의 아들' 이종범, KBO 역사상 가장 빠른 사나이<1>

[창간특집] '바람의 아들' 이종범, KBO 역사상 가장 빠른 사나이<1>

  • 기자명 이상민 기자
  • 입력 2020.11.20 10:00
  • 수정 2020.11.20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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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 전 코치는 지난 12일 데일리스포츠한국 창간 7주년 기념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데일리스포츠한국 DB)
이종범 전 코치는 지난 12일 데일리스포츠한국 창간 7주년 기념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데일리스포츠한국 DB)

[데일리스포츠한국 이상민 기자] “투수는 선동렬, 타자는 양준혁, 야구는 이종범.” 

이종범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간단명료한 말이다. 이종범은 KBO 역사상 가장 빠른 선수로 꼽힌다. 1993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도(大盜)로 성장했다. 통산 510개의 도루를 기록했고 한 시즌 최다, 한 경기 최다 도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투수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야구천재였다. 

커리어 하이는 1994년이다. 당시 타율 0.393, 도루 84개, 안타 196개로 KBO 역대 한 시즌 도루 1위(84개), 타율 2위(0.393), 안타 3위(196개)의 기록을 세웠다. 1997년엔 30홈런 64도루로 유격수 중 유일하게 30홈런-30도루를 달성했다.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5툴 플레이어였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단순히 타격이 아니라 야구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개인 기록뿐만 아니라 해태의 9번의 우승 중 세 차례 우승에 기여했다. 

타이거즈의 영구결번자이기도 하다. 이종범은 데뷔 때부터 사용하던 7번을 은퇴할 때까지 사용했다. 일본에서 복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종범과 ‘7’의 인연은 계속됐다. 한화 이글스 코치(73번), LG 트윈스 코치(77번), 주니치 드래건스 코치(79번)까지 유독 ‘7’이라는 숫자와 야구 인생이 겹쳐 있다.  
 
NO.7 타이거즈의 유일한 야수 영구 결번
이종범을 최고의 선수로 만든 것은 탄탄한 기본기와 부지런함이다. 그는 학창시절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야구만 했고 프로에 입단해서는 남들보다 일찍 나와 훈련에 매진했다. 그날 경기에 대한 분석과 이미지트레이닝도 잊지 않았다. 그 결과 정교한 타격, 주루 뿐 아니라 장타에도 자신감이 생기며 30홈런(당시 2위) 고지를 밟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선수 치고 체구가 크지 않았다. 때문에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때까지 14년 동안 기본기에 중점을 두고 훈련을 했다. 타격은 강한 손목과 배트 스피드, 수비는 강한 어깨와 넓은 수비 범위, 주루에서는 스피드를 생각하면서 운동을 했다. 이러한 것들이 결집이 된 순간 프로에 입문하면 잠재력이 터진다. 연습량, 기본기, 근성, 타고난 체력들이 바탕이 돼야 기록들을 만들 수 있다.”

이종범은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MVP를 수상했다. (사진=연합뉴스)
이종범은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MVP를 수상했다. (사진=연합뉴스)

이종범하면 생각나는 것은 역시 도루다. 눈이오나 비가 오나 누에 출루하기만 하면 어김없이 뛴다. 그가 출루하는 순간 상대 투수와 포수, 그리고 벤치까지 이종범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쉴 새 없이 뛴 이종범은 KBO에서 도루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들을 갖고 있다. 한 시즌, 한 경기, 하루 최다 도루 기록 보유자다. 통산 도루 순위에서는 전준호(549개)에 밀린 2위(510개)다.

“슈퍼스타가 되기 위해 내가 가진 장점을 극대화했다. 앞 만보고 뛰었다. 다쳐도 부러지지만 않으면 뛰었다. 뛴다는 마음만 있으면 두려움이 없다. 타석에서는 나보다 더 강한 투수가 나와도 자신감을 잃지 않고 부딪혔다. 도루를 할 수 있다고 주문을 외웠다. 투수의 습관과 견제 동작을 분석하고 폼을 보고 뛰었다. 투수의 습관이 안보이면 포수의 습관을 봤다. 요즘 시대에 야구를 했더라도 무조건 뛰었을 것이다. 성공할 자신이 있다. 지금은 경기가 늘어 그때보다 더 많은 도루를 기록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이종범은 최근 프로야구에서 도루가 줄어든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KBO 리그 도루 개수를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다. 최근 3년 연속 40도루 이하 도루왕이 나왔다. 과거 50개 이상의 도루를 해야 타이틀 홀더를 따냈던 시대와 비교하면 명확하게 차이가 난다. 
 
“팀마다 색깔이 있고 감독의 주문이 있고 원칙이 있지만 자기를 부각을 시키고 퀄리티를 높이고 세계무대에서 돋보이려면 득점권에 나가 뛰어야 한다. 그런 희생을 해야 하는데 요즘 선수들은 다친다고 안 뛰니 야구가 재미없다. 포스트시즌과 같은 단기전에서는 주루 플레이가 좋은 팀이 우승할 가능성이 크다. 부상 때문에 팀에서 뛰지 말라고 한다. 고과 선정도 도루 감소 원인이다. 홈런 10개 보다 도루 50개가 연봉을 덜 받는다. 당연히 선수들은 안 뛴다.”

프로야구 역사에 획을 그은 이종범이지만 그 역시 프로 생활 중 아쉬운 기록도 있다. 이종범의 통산 기록은 1706경기 출전 타율 0.297 1797안타 194홈런.  
 
“통산 타율 3할과 2000안타 기록을 달성 하고 싶었다. 그런 기록들을 생각하면서 경기를 뛰었어야 했는데 막연히 ‘언젠가는 하겠지’라고 생각했다. 정확한 숫자를 설정하고 몸 관리를 했어야 했는데 못했다. 다시 태어나면 그런 목표들을 구체적으로 설정해서 뛸 것이다. 일본을 안 갔으면 도루는 700개 정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홈런도 250개는 쳤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면 일본을 안 갔을 것이다. 가는 순간 KBO 기록은 못 채울 줄 알았다. 그렇다고 통산 도루 1위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도루는 뛰는 나이가 정해져 있다. 일본에서 돌아오니 32살이었다.”

이종범은 일본에서 복귀 후에도 타이거즈 군단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사진=연합뉴스)
이종범은 일본에서 복귀 후에도 타이거즈 군단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사진=연합뉴스)

페넌트레이스, 한국시리즈 MVP부터 골든글러브, 각종 타이틀을 따낸 이종범이지만 생애 딱 한 번 받는다는 신인왕은 받지 못했다. 당시 입단 동기이자 1년 선배 양준혁에 밀려 아쉽게 수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종범은 양준혁이 당연히 받아야 했다고 말을 높였다. 

“옛날부터 아쉽지 않다고 이야기 했다. 그때 준혁이 형이 타격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대신 나는 통합우승, 도루왕을 했다. 신인왕은 성적으로 해야 하니까 당연히 못 받을 줄 알았다. 상대적으로 월등하다고 생각했다. 준혁이 형과 라이벌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야구 스타일이 다르다. 옛날에는 영남, 호남으로 나눠 비교하고 싸움을 많이 붙였다. 라이벌이 아니라 경쟁 상대였다. 라이벌은 내 자신이다. 자신한테 지면 상대를 못 이긴다는 생각을 가지고 야구를 했다. 라이벌이 누구냐고 물으면 없다고 했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뛰었다.”

2001년 일본에서 돌아온 이종범은 줄곧 한국에서 뛰었다. KBO 복귀 후에도 타율 3할, 50도루 등 발군의 기량을 발휘하며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이종범은 불혹에도 1군 무대를 뛰었다. 2012년 만 42살의 나이에 스프링캠프를 소화하고 시범경기까지 뛰었다. 그러나 한 달 후 돌연 은퇴했다. 

“은퇴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다. 말이 와전 됐다. 2011 시즌이 끝나고 감독이 바뀌었다. 그럼 다음 시즌 계획을 선수에게 확실하게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선동렬 감독이 부임했을 때 다음 시즌은 힘들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만두라고 했으면 그렇게 하려고 했다. 야구를 한다고 말하니 열심히 해보라고 해서 캠프까지 갔다. 시범경기 때 타율 3할을 넘게 쳤다. 감독, 코치 등 여러 사람들의 입장이 서로 달랐다. 깔끔하지 못한 은퇴였다.” 

2편에서 인터뷰가 계속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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