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 칼럼> 되살아난 구시대의 유물 ‘사상 전향’

<김주언 칼럼> 되살아난 구시대의 유물 ‘사상 전향’

  • 기자명 김주언 논설주간
  • 입력 2020.07.30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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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진 듯했던 ‘사상전향’ 발언이 터져 나왔다.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의사당에서 ‘색깔론’이 버젓이 되살아났다. 그것도 4선의원을 지낸 장관후보를 대상으로 한 국회의원의 질의에서다. 탈북민 출신인 태영호 통합당 의원이 청문회에서 이인영 통일부장관 후보에게 따져 물었다. “주체사상을 버렸다, 주체사상 신봉자가 아니다, 라고 말한 적 있습니까?” 이 장관후보가 전대협의장 시절 주체사상을 신봉했다고 전제하면서 나온 사상공세이다. 독재정권 시절 운동권 학생들을 취조하던 공안검사의 표독스러운 모습이 떠오른다.
태의원은 질의시간 내내 비슷한 주장을 폈다. 그는 이후보가 대학시절인 1987년 결성돼 제 1대 의장을 맡았던 전대협 회원들이 “매일 아침 김일성 초상화 앞에서 남조선을 미제 식민지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충성맹세를 했다고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북한 노동신문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북한 선전매체의 보도내용을 사실로 전제한 뒤 물어본 것이다. 태의원은 아직도 노동신문의 보도내용을 사실로 믿고 있는 것 같다. 이후보는 “북에서 잘못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일은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태의원의 시대착오적 발언에 대한 이후보의 지적은 날카롭다. 그는 “이른바 전향이라는 것은 태의원님처럼 북에서 남으로 오신 분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며 “저에게 사상전향 여부를 묻는 건 온당하지 않은 질의내용”이라고 꼬집었다. “북에서는 이른바 사상전향이란 것들이 명시적으로 강요되는지 모르지만 남쪽은 사상과 양심을 강요하지 않는다. 사상전향 여부를 물어보는 것은 남쪽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이후보의 지적대로 남한의 독재정권들은 사상검증을 통한 전향을 강요했다. 물론 전향하지 않은 많은 사상범들은 평생 감옥에 머물러야 했다. 일부 비전향 장기수들은 북한에 송환되기도 했다. 1993년 이인모 노인을 비롯해 2000년에는 송환을 희망하는 63명이 북한으로 돌아갔다. 1998년 한국 정부는 전향제도를 폐지해 이제 ‘사상 전향’이라는 말 이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대한민국 헌법도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 다만, 국가보안법이 살아 있어 북한을 이롭게 하는 행위는 처벌할 수 있다. 그러나 법원은 과거보다 엄격하게 국보법 위반여부를 판단한다.
과거 독재정권들은 사상검증에 철저했다. 심지어 비판세력에 대한 사상검증을 통해 이들을 공산주의자나 용공세력으로 몰아 감옥에 가두었다. 국가보안법의 이적표현물 소지죄를 적용했다. 집에 보관하거나 가지고 있던 이념서적이나 유인물 등은 사상검증 자료로 악용됐다. 일기장은 필수 압수품목이었다. 붉은 줄이 처진 일기장은 나중에 돌려 주었다. 해외서적 반입도 검열절차를 거쳐야 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막스 베버의 저작들도 반입되지 못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다. ‘사회’는 사회주의, 막스는 마르크스로 오인했기 때문이다.    
소위 이적표현물에 대한 감정은 주로 내외문제연구소라는 데서 이뤄졌다. 문공부 산하기관으로 북한과 동구권 동향을 분석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북한뉴스를 전담하는 내외통신을 발간했다. 내외통신은 북한비판이 주임무였다. 김대중정부 들어 1998년 연합통신(현 연합뉴스)에 흡수됐다. 이적표현물에 대한 사상검증은 연구원들이 담당했다. 대부분 북한 출신으로 간첩으로 남하했다가 전향한 인물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서점에서 버젓이 팔리고 있는 책도 이적표현물로 낙인찍었다. 사회주의 비판서적도 이들의 눈에는 이적표현물로 보였을 뿐이다.
공안검사들의 시각도 이들과 똑같았다. 이들은 내외문제연구소의 감정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여 기소했다. 부천서 성고문사건에서 ‘운동권 학생들은 성을 혁명도구화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수사결과를 발표한 이들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국내 학자들은 반박 의견서를 제출했지만, 당시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학술서적조차 내외문제연구소와 공안검사 판사의 손을 거치면서 이적표현물로 둔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거 이들의 행태를 떠올린 것은 태의원이 독재정권의 환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태의원은 질의과정에서 자신을 ‘김일성 주체사상의 원조’라고 지칭했다. 한국에 들어온 뒤 첫 기자회견에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침으로써 사상전향을 검증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태의원은 국회의원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대한민국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선서한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이후보는 그가 탈북하기 훨씬 이전부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었음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태의원이 대한민국 국민자격이 있는지 국민이 검증해야 하지 않겠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인 셈이다. 
청문회에서 민주당 의원들은 태의원을 비난하는 쓴소리를 쏟아냈다. “국회를 모욕하는 행위” “반헌법적 질의” “천박한 사상검증” 등으로 발끈했다. 하지만 태의원은 “민주주의 질서에 위반되는 것”이라며 수긍하지 않았다. 통합당 의원들은 “사상검증은 당연한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나아가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부로 인정하는지”를 따져 물었다. ‘민주질서’는 이분법적 흑백논리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이들은 모르는 것 같다. 그를 비호하고 나선 통합당 의원들은 사상검증으로 비국민을 걸러내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것인가.  
태의원이 북한을 탈출하기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북한의 압제를 피해 자유를 찾았다는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다. 북한 매체가 공격하는 내용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북한전문가를 자처하는 점은 따져 물어야 한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의 위중설이 퍼졌을 때 팩트없는 추정으로 헛물을 켰다. 한국전쟁 70주년 추념식에서 연주된 애국가 도입부가 북한국가와 비슷하다는 엉뚱한 트집도 있었다. 북한이 개성 연락사무소를 폭파하기 이전에 “폭파하지 않을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모두 틀렸다.
태의원은 아직도 적대적 북한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핵폐기가 전제되지 않는 종전선언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요구하는 핵보유인정 선언이 될 것이다. 여당이 추진하는 종전선언 결의안은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한 김정은에 선물을 갖다 바치는 것이다.” 엄연히 다른 종전선언과 비핵화를 함께 붙여버린 것이다. 정세균 총리의 지적은 이를 잘  해준다. “비핵화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종전선언이 출발점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태의원이 시도했던 사상검증은 과거 독재정권이 국민을 억누를 때 사용하던 사악한 칼날이다. 독재에서 도망쳐 새로운 땅에 정착한 곳에서 또 다른 독재의 칼날을 휘두르는 것은 누가 봐도 모순이다. 누리꾼은 이를 코미디에 비유했다. “진짜 빨갱이가 여당 원내대표 출신 통일부장관 후보의 사상을 검증하고 있는 모습은 코미디 같은 상황이다.” “악독한 친일경찰 노덕술이 독립운동가 김원봉에게 모욕을 주던 역사적 비극이 생각났다.” 민주화한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웃픈’ 현실이다. 
태의원과 같은 탈북민을 색깔론 공격수로 전면에 내세운 통합당의 행태도 우려스럽다. 색깔론은 과거 분단체제에 편승한 보수기득권 세력이 즐겨 사용한 통치방법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고문에 시달렸다. 간첩이나 용공단체 조작사건도 수없이 자행됐다. 이제서야 과거의 잘못된 아픈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통합당은 최근 근대화와 함께 민주화 정신도 계승하겠다며 새 정강정책 초안을 발표했다. 국민분열을 조장한 과거를 반성하겠다는 다짐이다. 초안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과거의 사상검증으로 돌아간다면 통합당의 미래는 암울하기 그지없다.

김주언(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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