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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언 칼럼> 40년만에 ‘5·18 오보’ 바로잡고 사과한 경향신문
  • 김주언 논설주간 newmedia54@dailysportshankook.com
  • 승인 2020.05.21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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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보도를 외면한 언론도 5·18의 진실을 흐리게 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경향신문도 예외가 아니다. 경향신문이 1980년 5월18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부터 5월말까지 13일간 내보낸 5·18관련 보도 108건중 계엄군의 폭력진압등 광주의 실상을 제대로 알린 보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뿐이다. 늦었지만 경향신문은 5·18연구소와 5·18기념재단의 감수를 받아 과거보도를 바로잡기로 했다. 이런 노력들이 모여 그날의 진실이 온전히 밝혀지고, 정의가 바로 서고, 역사에 자랑스럽게 기록되기를 바란다.”
경향신문이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사설을 통해 사과한 내용이다. 경향은 불혹의 세월동안 진실인양 남아있던 과거기사를 뒤늦게나마 바로잡았다.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경향의 진솔한 고백이 눈길을 끈다. “진상규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원인은 언론에도 있다. 대다수 언론은 계엄군이 1980년 광주시민을 폭력 진압했을 때 현장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다. 언론이 스스로 당시 사건의 진상에 다가서야 했지만 현장취재가 부족했다. 계엄사령부 등 당국 발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썼다.” 중앙언론사가 5·18관련기사를 정정하고 사과한 것은 처음이다. 

경향은 1980년 5월18일을 전후한 자사보도 108건을 분석했다. 계엄군의 폭력 진압 등 당시 광주 실상을 다룬 보도는 0건이었다. 계엄군의 집단발포와 광주 진압작전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최소 27건의 기사는 계엄사와 정부 등 당국자료나 계엄사령관 등 관계자의 발언을 그대로 받아서 작성했다. 계엄군에 비판적 사설은 찾기 어려웠다. 경향신문 경영권은 1974년 박정희정권의 언론통폐합 이후 5·16장학회(현 정수장학회)가 가지고 있었다. 계엄하에서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고 신군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도 못했다.
경향은 1980년 5·18 당일 계엄확대 이유로 “국민여망에 부응”한다는 정부성명만 다룬 기사를 “아침부터 공수여단은 광주학생을 연행했다”로 정정했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 기사는 “대남적화” 등 정부측 이유만 담았으나 이를
“계엄군, 광주진압 시작해 시민 사망자 낳았다”로 고쳤다. 5월21일 “군경 5명 민간인 1명 사망” 보도는 “도청앞 금남로에서만 최소 54명 죽었다”로 정정했다. 5월23일 “광주는 치안부재 상태” 기사는 “5·18기간중 광주에 출동한 육군 헬기 40여대 중 일부가 5월21·27일 시민을 상대로 여러 차례 사격했다”로 바로잡았다.
5월22일 ‘계엄군 “불순인물” “고정간첩” 주장’ 보도는
‘재판부 “비방목적 허위사실이었다”’로 정정했다. 당시 이회성 계엄사령관은 담화를 통해 “타지역 불순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해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약탈 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7년 국방부 진상규명위는 계엄사 등 상층부가 “사실을 왜곡한 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시위를 규정”했다고 판단했다.
이밖에 ‘광주잠입 간첩 검거’는 ‘그 간첩은 광주와 무관’으로, “계엄군, 폭도 상대 평화적 해결 노력”은 ‘‘위험한 작전’ 알면서도 광주 재진입 준비‘로 정정했다. 광주 치안상황을 전한 기사는 “완전한 무질서”라는 표현에서 “당시 광주치안은 안정적”으로 바꿨다. 5월31일 1면 ‘광주사태 민간인 144명 사망’기사는 계엄사 발표를 그대로 담은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사망자수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기사는 ‘현재까지 165명 확인, 아직도 과제 남아’로 바로잡았다.
당시 보도내용은 단지 경향신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거의 모든 신문이 대동소이했다. 계엄하의 사전검열로 보안사의 보도검열 지침에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신군부는 집권을 위해 이를 악용했다. 1987년 언론청문회 직후 공개된 ‘K-공작계획’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신장을 위한 안정세력을 구축’을 위해 중진언론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것이다. ‘K-공작계획’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결재를 받아 실시됐다. 한마디로 “전두환을 최고인물로 만들기 위한 언론공작”이었던 셈이다.
기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당시에는 언론사에 노조가 없었다. 기자들의 모임인 기자협회가 중심에 섰다. 기자협회는 5월20일부터 계엄철폐를 위한 제작거부에 나서기로 했다. 제작거부를 결의한 김태홍 회장을 비롯한 집행부는 수배됐다. 하지만 취재기자들은 20일부터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5·18항쟁이 일어난 뒤 이틀만이었다. 기자들은 광주항쟁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한 줄도 보도할 수 없었다. ‘계엄사 발표 때까지 보도하지 말 것’이라는 보도검열 지침 때문이었다.
광주현장을 취재했지만 기사를 내지 못한 윤재걸 전 동아일보기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군이 시민의 가슴에 총을 쏘는 것을 확인하고만 왔을 뿐이다. 2박3일간 광주에서 직시한 사실을 동아일보 사내에 보고했다. 그 사실이 기관원을 통해 알려졌고, 34살에 강제 해직됐다. 이후 4년간 광주현장을 취재했다. 기사가 85년 신동아에 나오자 서빙고 보안사에 끌려가 전라로 고문을 당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전두환정권은 집권기간 내내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내려 5·18보도를 엄격하게 통제했다. 보도지침을 지키지 않으면 고문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두환 신군부는 기자들의 저항을 없애기 위해 언론학살을 자행했다. 언론사통폐합과 언론인 강제해직, 보도지침 하달이 그것이다. 제작거부를 주도하거나 적극 가담한 기자들은 해직 1순위였다. 보안사에서 해직기자 명단을 언론사에 통보한 뒤 언론사가 해고하는 순서를 따랐다. 1980년 해직된 언론인만도 700명을 넘는다. 이들은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를 구성해 자유언론운동에 매진했다. 1988년 언론청문회 이후 일부는 복직하거나 신설된 언론사에 취업했다. 그러나 국가의 배상이나 보상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경향신문이 40년이나 지나 5·18당시 보도를 정정한 것은 이례적이다. 한국언론은 오보로 판명되더라도 자진해서 사과하고 정정보도를 내는 데 매우 인색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부의 공식발표 내용을 보도했다가 거짓으로 드러났다며 바로잡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특히 북한관련 오보는 아예 정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퍼져있는 것처럼 보인다. 북한관련 오보는 30년 넘게 이어져왔지만, 정정보도를 내거나 독자들에게 사과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보로 밝혀졌는데도 온라인기사에 아직도 노출되는 뻔뻔함마저 보인다.  최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관련 보도도 그렇다. 사망설까지 제기됐던 김위원장이 공개활동을 통해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러나 오보를 바로잡거나 사과한 언론사는 거의 없다. 북한 지도층 인사를 둘러싼 오보는 헤아리기 어렵다. ‘김일성 사망설’, ‘김정일 피격·대역설’, ‘김경희 독살설’ ‘현송월 총살설’ 등이 대표적이다. 1986년 국내 일간지는 김일성 주석이 총을 맞아 피살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김주석은 버젓이 나타났고 그로부터 8년뒤인 1994년 7월8일 사망했다. 현송월은 버젓이 김정은 위원장을 수행해 서울에 나타나기도 했다.
한겨레신문이 지령 1만호를 맞아 재정비한 취재보도준칙은 오보대응 원칙을 이렇게 표명했다. ‘보도 또는 논평의 잘못이 확인되면 최대한 빨리 바로잡는다. 잘못을 바로잡는 기사는 충분하고 분명하며 정중하게 작성한다. 실수 또는 잘못이 드러난 기사는 온라인에서 지속적으로 보완하여 완결성을 높인다.’ 오늘날 기자들은 ‘기레기’로 지탄받는다. 그만큼 신뢰가 추락했다는 반증이다. 신뢰를 회복하려면 오보로 판명난 기사는 즉각 바로잡고 사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자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김주언(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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