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 칼럼> 여의도에 찾아온 ‘배신과 보복의 계절’

<김주언 칼럼> 여의도에 찾아온 ‘배신과 보복의 계절’

  • 기자명 김주언 논설주간
  • 입력 2020.03.31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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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메르스사태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박 전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유 전원내대표를 겨냥해 “자기 정치를 하고 있다”며 이렇게 불렀다. 원내대표에서 쫓겨난 유의원은 1년뒤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다. “배신의 정치는 패권주의와 줄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선거에서 심판해야 할 것”이라는 박 전대통령의 말에 따른 것이다. 메르스 사태로 나라가 온통 뒤숭숭한 판국에 일어난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메르스처럼 신종감염병인 코로나19 사태 와중에 같은 당에서 ‘배신의 정치’가 되살아났다. 총선을 앞두고 공천 파열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 의원은 20대 총선에서 낙천한 뒤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2017년 촛불항쟁 과정에서 김무성의원 등과 합세해 박근혜 전대통령 탄핵에 동참했다. 박 전대통령은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달라고 호소했으나 오히려 심판당하는 역풍을 맞은 셈이다. 유의원은 이후 새로 만든 정당에서 대통령후보로 나섰다가 패배했다. 그로부터 4년 뒤 박 전대통령을 대신해 당시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인사가 배신의 정치를 끝장내겠다며 유의원의 지역구 출마를 선언했다. 하지만 유의원이 출마하지 않아 ‘보복의 정치’는 성사되지 못하게 됐다.

공천에서 탈락한 홍준표 전한국당 대표는 통합당 탈당과 함께 대구 수성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홍 전대표는 경남 양산을 공천에서 배제된 뒤 “25년 정치하며 처음으로 사람이 무섭다”며 배신감을 토로했다. 당 대표를 지내고 대선까지 나선 공로를 무시했다는 울분이다. 홍 전대표는 이를 “대선 경쟁자 쳐내기”로 해석했다. 황교안대표가 김형오 공관위원장과 손잡고 경쟁자들을 배제시켰다는 주장이다. 김위원장도 자유롭지 않았다. 최고위가 강남을 공천을 취소하자 “나에 대한 보복”이라며 사퇴했다. 자신의 공천에 불만을 품고 공천취소로 보복했다는 것이다.

앞서 ‘골수 친박’ 조원진의원은 홍 전대표에게 “정치 잡놈”이라는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홍대표가 박근혜 전대통령에게 배신의 칼을 꽂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조의원은 “홍준표씨가 정략적 판단이라는 명분을 세우지만 자기가 살아남기 위한 배신행위”라며 “준비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홍대표 측은 “패악무도하고 구상유취한 자의 발언”이라고 반박했다. 조의원은 김무성 유승민 두 의원에게도 “배신자” “역적”이라고 공격했다. “좌파정권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자유민주주의 무너뜨리는 역할한 사람”이라는 주장이었다.

조의원은 총선을 앞두고 태극기세력 등과 연대하여 자유공화당을 만들고 박 전대통령 석방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박 전대통령은 유영하 변호사를 통해 발표한 옥중편지에서 ‘기존 거대정당’(통합당 지칭)을 중심으로 단합해 여권을 심판해달라고 했다. 자신을 탄핵하고 구속시킨 문재인정부에 대한 보복심리였다. 그러나 자유공화당은 통합당을 중심으로 통합하지 않고 독자세력을 유지했다. 유 변호사는 박 전대통령이 통합당을 중심으로 보수세력이 힘을 합치라는 메시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통합당의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에 공천을 신청해보라고 권유했다고 밝혔다. 그는 공천을 신청했으나 탈락했다.

유변호사는 “나를 국론분열세력이라는 이유로 몰아서 내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공병호 공관위원장처럼 탄핵을 찬성한 사람들이 국론에 부합한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냐”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박 전대통령은 “통합의 메시지가 무위로 돌아간 것 같다”며 “도와주려는 카드를 능욕당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두번 칼질 당한 것”이라며 “사람들이 어쩌면 그럴 수 있나요”라며 배신감을 내비쳤다는 것이다. 이로써 일부언론이 극찬했던 ‘박근혜 옥중서신’의 메시지는 성사되지 못했다. 박근혜의 통합메시지가 총선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된 셈이다.

유변호사가 공천을 신청한 한국당의 내홍도 만만치 않다. 통합당 황교안 대표는 대학동문인 한선교의원을 위성정당인 한국당 대표에 앉혔다. 한대표가 자신의 ‘지시’대로 공천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한대표는 황대표의 ‘지시’를 거부했다. 통합당의 영입인재들을 뒷순위에 배치하고 독자적으로 비례대표 후보를 선정하여 발표한 것이다. 창당초기만 해도 ‘자매정당’을 표방했지만 한대표가 독자노선으로 가려 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황대표는 “태어나서 이런 배신은 처음 당해본다”고 한탄했다는 후문이다.

한대표는 통합당의 엄포에 밀려 결국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가소로운 자들에 의해 정치인생 16년의 마지막을 당과 국가에 봉사하고 좋은 흔적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은 막혀버리고 말았다”는 사퇴의 변을 남겼다. 더 나아가 “부패한 권력이 참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저의 개혁을 막아버리고 말았다”며 황대표와 측근들을 겨냥했다. 한대표는 이후 유화적 제스처를 보였으나 황대표의 공천간섭과 대표직 사퇴압력을 보복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황대표의 공천관여는 선거법 위반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의당과 시민단체가 황대표를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민주당도 자유롭지만은 않다. 비례연합정당(플랫폼정당)으로 시민사회 원로가 주축인 정치개혁연합 대신 '시민을 위하여'를 선택한 것을 두고 벌인 논란이 그렇다. 정개련의 하승수 변호사는 "민주당이 민주화운동 원로나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정치개혁연합을 마타도어했다"며 “진정성있게 연합정치를 고민하고 논의해온 주체들을 배제하기 위한 치졸한 정치 공작극”으로 몰아부쳤다. 자신들은 이용만 당하고 정치보복을 당했다는 주장인 셈이다. 민주당은 시민을 위하여 추진세력과 함께 신생 원외정당들이 참여한 더불어시민당을 출범시켰다.

민주당은 자당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할 경우 영구 제명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낙천됐다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공천받은 후보의 표를 갉아먹으면 영원히 당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미이다. 컷오프된 정봉주 전의원과 손혜원 의원 등이 창당한 비례용 정당 열린민주당에 대한 태도도 그렇다. 공천배제된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 등이 비례대표로 나섰기 때문이다. 열린민주당은 총선이후 민주당에 들어가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총선이후에도 합당은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다만 정치연합은 가능하다고 했다. 당사지들에게는 정치보복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지를 남긴 셈이다.

세계사를 보더라도 배신과 보복은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예수를 로마에 팔아넘긴 가롯 유다는 배신의 아이콘이다. 자신을 아들처럼 아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마르쿠스 브루투스도 마찬가지다. 단테는 ‘신곡’에서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는 9계를 ‘배신지옥’으로 묘사했다. 국내에서도 조선시대는 물론,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도 배신과 보복이 되풀이됐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혁명동지’였던 윤필용을 배신자로 몰아 단죄했다. 그도 충복이었던 ‘배신자’ 김재규의 손에 세상을 하직했다. 전두환 전대통령은 자신에 비판적이었던 정치인 김대중을 내란음모사건 조작으로 보복했다.

민주화 이후 정치적 배신과 보복은 살벌한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주요 직책에서 쫓아내거나 공천에서 배제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런데도 조폭집단에서 자주 사용하는 배신과 보복이라는 살벌한 용어가 난무한다. 암흑가를 다룬 느와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이제 여의도 정치권이 “조폭과 다를 게 뭐냐”는 비아냥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협잡꾼들의 난장판에 다름아니다”는 말이 가슴에 와닻는다. 코로나19 사태로 고통받는 국민을 더욱 짜증나게 하는 행태들로 정치혐오를 가중시키지 않을까 우려된다.

정치혐오는 맹목과 궤변, 막말로 가득차 있는 정치권의 행태로 더욱 가중된다. 총선을 앞두고는 살벌한 진영논리가 판을 친다. 진영논리에 갇힌 정치권은 자기편을 결속시키기 위해 시위와 농성을 일삼는다. 막말과 궤변 등으로 무조건적 믿음을 만들어 선전하고 선동한다. 진실여부는 상관없다. 내부적으로는 자신의 위상을 공고화하기 위해 비판세력을 공천 등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 쳐낸다. 이 과정에서 배신과 보복의 정치가 탄생하는 것이다. 유권자들도 진영논리에 갇혀 ‘묻지마 지지’나 ‘무조건 반대’를 내세운다. 정책에는 관심이 없다. 언론도 진영논리를 부추기는 데 앞장선다.

정치권은 자기진영 내부에서도 배신과 보복 등 자극적 언어로 정치적 경쟁자들을 헐뜯기에 바쁘다. 총선을 앞두고 여의도에 ‘배신과 보복의 계절’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배신자는 자신의 정적이 아니다. 정치적 경쟁자들끼리의 싸움에서 나오지 않는다. 진짜 배신자는 선거과정에서 온갖 사탕발림으로 유권자들의 환심을 산 뒤 금배지만 달면 잊어버리는 의원들이다. 유권자들은 공약(公約)을 공약(空約)으로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의원들을 기억해 반드시 심판해야 한다. 그 길만이 ‘배신과 보복의 정치’를 막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이제 정당들은 공천을 마무리하고 본격 선거운동에 들어간다. 코로나19 사태로 국민이 고통받고 있는 와중에서도 선거일은 2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정작 정당들과 후보들이 내세우는 핵심공약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코로나 블랙홀’이 모든 사안을 집어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선거홍보물을 꼼꼼히 살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정책공약을 내세우고 이를 성실하게 실행에 옮길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 배신과 보복이 난무하는 정치권을 협상과 타협을 통한 민주국회로 이끌어갈 선량을 선택하는 것은 유권자의 의무이다.

김주언(논설주간ㆍ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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