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의 관풍(觀風)>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다시 생각케 하는 21세기 동북아 정세

<김성의 관풍(觀風)>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다시 생각케 하는 21세기 동북아 정세

  • 기자명 김성
  • 입력 2020.03.19 12:05
  • 수정 2020.04.0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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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安重根 義士)가 순국한지 110주기 되는 날이다. 그의 순국일이 다가오면서 지금 동북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측불허의 정세를 바라보며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安의사, 이토 척살이 동북아 평화 유지라고 판단

안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비교적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장하던 과정인 1882년에 조선은 미국·영국·독일과 차례로 불평등 통상조약을 맺었다. 이렇게 국권이 흔들리자 젊은 급진 개화파 지식인들이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 안 의사의 부친은 개화파와 가까이 지내다가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가톨릭 성당으로 피했다가 나중에 가족 모두 가톨릭에 입교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정적 배경 때문에 그는 국제관계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그래 중국 상하이에서 국제사회에 대한제국의 현실을 알리는 홍보활동을 했고, 이후 교육사업과 무장투쟁도 벌였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살아있는 한 서구 국가들과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나 동양평화가 유지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토는 1904년 러일전쟁 직전 고종을 찾아와 러시아에 대항하는 ‘한일동맹’만이 동양의 평화를 지키고 대한제국을 보전하는 길이라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안 의사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이토는 입으로는 평화를 말하지만 통감으로 있으면서 동양평화와 대한제국의 독립을 해쳐왔다고 보았다. 하여 동양평화를 위해 이토를 척살해야한다고 결심하였다.

동양평화회의-공용화폐발행-평화유지군 구상 밝혀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저격 살해한 후 5개월 뒤 처형당했다. 이 동안 그는 비록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옥중에서 동양평화에 대해 저술을 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동양평화는 한 · 청 · 일 동양 3국이 수평적으로 대등한 연대로 제휴하여 동양평화회의를 구성하자는 것이었다. 3국이 은행을 설립하여 공용화폐를 발행하자고도 했다. 이는 1백년 뒤 현실화된 EU의 유로화(貨)와 다름없어 놀라운 선견지명을 보여주었다. 또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해 3국의 청년들로 군단(軍團)을 편성하여 영원한 평화체제 축으로 활용하자고 했다. 그러면 인도, 태국, 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도 이 평화회의에 가입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오늘날의 유엔과 유엔군·평화유지군 개념과 유사했다. 실현여부를 떠나 놀라운 구상이었다. 그런데 최근 전개되고 있는 동북아 정세를 보면 걱정스럽다.

중국은 우리나라의 전체교역량 25%(2018년 말 기준 수출 1,503억 달러 수입 970억 달러)를 차지하는 최대 교역국이다. 그런데 미국이 한국에 사드를 배치하자 그동안 한국의 앞선 경제수준을 받아들이기 위해 투자와 교역량을 꾸준히 확대해 왔던 중국이 돌변하여 한국관광방문을 금지해 우리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후 한국관광 허용을 철회할 듯 말 듯 하며 한국의 애를 태우고 있다. 그래서 한국은 4월 시진핑의 한국방문으로 해소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코로나19사태가 나자 중국과 한국은 서로 마스크 보내기 등으로 관계를 개선해 나가고 있긴 하다.

북한과 일본은 가장 예민한 외교적·군사적 변수이다. 북한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과 세 차례나 만나 역대 정권 사상 가장 많은 정상회담을 가졌다. 또 역사상 처음으로 트럼프와도 세 차례 만나 핵과 장거리 미사일 해결을 위한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남북관계나 북미관계가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한 채 유엔의 경제봉쇄정책이 계속돼 북한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다.

일본, 올림픽 연기되면 한국 향해 ‘정치적 공격’ 가능성 커

일본은 한반도 영토에서 청일전쟁(1984년)과 러일전쟁(1904년)을 벌여 이기면서 서구제국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후 미국에 대해서는 필리핀의 미국 식민지화를 동의하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주도권을 인정받아(1905년 가쓰라-테프트 밀약) 한일합병(1910년)에 이르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후방 군수산업으로 경제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한국의 제 1공화국 정부 때부터 한일청구권협상을 벌였으나 일본은 한반도에 놔두고 온 자신들의 재산이 더 많다고 주장하거나, 노회한 이승만 정권과의 협상을 회피하다가 일본식 교육을 받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자 무상 3억-차관 3억 달러라는 청구권자금 제공으로 한일국교를 정상화(1965년) 시켰다. 이후에 독도영유권 주장, 아시아지역 침략전쟁을 참회하지 않은 채 일본교과서 출판문제,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를 부정하는 입장을 견지해 한일 갈등이 노정되었다. 최근에는 한국근로자들에 대한 배상문제에 대해서도 청구권협상으로 완료되었다는 입장만 되풀이 하다가 한국 대법원이 일본기업에 대한 재산몰수 판결을 내리자 2019년 아베 정권이 반도체 핵심 소재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였다. 일본은 한국에서 코로나19가 확산되자 한국정부와 사전 협의도 없이 일본에 입국하는 한국인에 대해 2주간 격리조치를 내렸다.

일본에서 올 7월에 열기로 되어있는 올림픽이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연기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아베는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이후 전쟁할 수 있는 ‘정상국가’(아베측 주장)로의 헌법개정을 기도하고 있으나 이 또한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커졌다. 일본은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를 위해서 과거 김일성 생존시 100억 달러의 청구권자금을 협의한 적이 있다. 시대가 지났으므로 그 액수는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일본은 남북한 모두에게 이런 문제를 안고 있다. 올림픽이 연기되면 아베 정권은 전례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을 정치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부담을 덜고, 일본 국민의 단합을 유도할 가능성이 크다.

안 의사도 걱정할 과제 … 한국 입장단일화 필요

이처럼 불안한 동북아 정세의 해결방법은 동북아 3국이 안 의사의 ‘평화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일본의 반동북아적 정치행태가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부터라도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내부의 입장을 단일화해야 한다. 여당과 야당이 공동의 대외정책방향을 가지고 가야 한다. 그런데 과연 함께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안 의사도 같은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김성(광주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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