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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재원 칼럼] 네임 마케팅과 ‘이신우’
  • 지재원 기자 chijw21@daum.net
  • 승인 2020.01.15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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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자와 V자가 겹쳐진 로고 루이 비통의 핸드백은 한때 ‘3초 백’으로 불렸다. 지나다니다가 3초마다 볼 수 있는 핸드백이라는 뜻에서. 그만큼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명품백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루이 비통’은 여행가방을 전문으로 만들던 루이 비통(1821~1892)이 설립한 브랜드로, 나중에 후손들이 가방뿐 아니라 의류 주얼리 신발 선글래스 시계 등 패션 전분야의 제품을 망라하는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로 키웠다.

1987년에는 코냑과 샴페인으로 유명한 모에 에 헤네시사와 합병하여 LVMH사를 세웠는데, 60개 이상의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를 거느리고 있는 세계 최대규모의 패션회사로서 연간 매출액(37조원)이 우리나라 전체 의류시장 규모(40조원)와 맞먹을 정도다.

가방과 지갑 등 가죽제품류에서는 루이 비통 못지않은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도 마구용품을 만들던 티에리 에르메스(1801~1878)가 설립한 브랜드이고, 역시 승마용품으로 시작해 핸드백과 가죽제품 분야에서 명성을 떨치는 구찌 역시 구찌오 구찌(1881~1972)가 설립한 브랜드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의 대부분은 설립자의 이름을 상표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세기 전반기에 프랑스를 대표했던 디자이너 가브리엘 코코 샤넬(1883~1971)도 사후 50년이 가깝지만 명품 브랜드로서의 위상은 전혀 흔들림이 없다. 의상과 향수(샤넬 No. 5)를 필두로 핸드백과 각종 패션 액세서리류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스페인 출신이지만 프랑스에서 활동한 크리스토벌 발렌시아가(1895~1972), 프랑스의 크리스티앙 디오르(1905~1957), 이브 생 로랑(1936~2008) 등도 사후에도 변함없이 그들의 ‘이름’이 세계의 명품으로 통하는 디자이너들이다.

이들 브랜드 역시 의상에서 시작해 향수와 화장품, 핸드백, 선글래스와 신발류 등 거의 패션 전분야를 망라한다. 이브 생 로랑은 자신의 이름을 딴 담배도 있을 정도.

자신의 이름을 상품화하는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피에르 가르댕(98)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의상과 향수, 화장품, 주얼리, 핸드백과 캐리어 등 가방류, 만년필과 볼펜 등 필기류는 물론 파리의 고급 레스토랑인 맥심을 인수해서 전세계 주요 도시에 체인점을 두고 있다. ‘피에르 가르댕’ 이름의 상품들은 140여개국에서 900여종이나 팔리고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디자이너의 이름이 유명 상품으로 자리매김한 경우가 매우 드물다. 앙드레김(1935~2010)이 생전에 란제리와 도자기, 아파트와 냉장고, 신용카드와 자전거 등 10여종에 상표등록하여 연간 매출액이 1천억원에 이를 정도로 라이선스 비즈니스를 펼치기도 했지만 지속되지 못했다.

지하철역 상가나 상설 할인매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디자이너 브랜드 ‘이신우’의 경우는 위의 예들과 케이스가 완전히 다르다.

1968년 설립된 ㈜이신우는 ‘최초’ 수식어를 많이 갖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디자이너 브랜드였다. 1970년대에 한국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미국에 디자인을 수출하면서 뉴욕지사를 설립했고 동아일보사가 제정한 ‘올해의 디자이너상’ 최초 수상자(1984년), 일본 마이니치신문사의 패션상을 받은 최초의 외국인 디자이너(1991년), 도쿄 컬렉션(1990년)과 파리 컬렉션(1993년)에 최초로 참가한 한국인 디자이너였다.

1990년대말 ㈜이신우는 오리지날리 영우 쏘시에 이신우옴므 이신우컬렉션 등 5개 브랜드를 거느리고 있었고 직원 숫자도 5백명이 넘었다. 밀리터리룩을 주로 선보였던 쏘시에 브랜드의 TV광고 때는 헬리콥터를 동원할 정도로 스케일도 컸다.

그러나 IMF 사태로 연쇄부도 끝에 파산하면서 합정동 본사 사옥과 평창동 자택은 물론 회사 브랜드인 ‘이신우’까지 채권단에 넘어갔다. 이후, 지하철역 상가와 상설 할인매장에 ‘이신우’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작 본인은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사용하지 못하고, 씨누(CINU)를 따로 등록한 상태다.

20년이 넘도록, ‘이신우’가 시중에서 중저가 브랜드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신우’의 상표가치를 대변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독창성 면에서 한국 최고를 넘어, 일본의 이세이 미야케나 가와쿠보 레이에 견주었던 그의 이름이 그와 전혀 무관하게 시중에서 중저가 브랜드의 상표로 통용되고 있다는 것은 개인의 아픔이자 우리 패션사에서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월9일은 이신우 선생의 결혼 58주년 되는 날이다. 경기여고 졸업후 이화여대 미대 재학중에 결혼해 대학을 중퇴해야 했던 그의 부군은 박주천씨(1940~2006). 경기고 서울공대 출신의 그는 우리나라 대학에 ‘미팅’을 처음 도입한 사람이며, 대학 2학년 미팅 때 동급생을 만나 3학년에 결혼한 학생부부였다.

70년대와 80년대에, 패션을 ‘사치의 온상’으로 보고 시시때때로 압수수색하고 소환하던 상황을 고쳐보겠다고 국회에 진출해 3선 의원(1992~2004)이 되었지만, 정작 현직 국회의원이었음에도 아내 회사의 부도를 막지 못했다.

연초에 만난 이신우 선생(79)에게 새해의 소망이 무엇인지 묻자 “지금보다 더 수준높은 패턴사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가고 있는 딸(박윤정)이 디자인을 하면 패턴작업을 해주는 것이 요즘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것.

원로 디자이너의 소박한 소망 속에서, 우리나라 패션 현실의 한 단면을 느끼게 된다.

이신우 디자이너의 파리 컬렉션 출품작(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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