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스포츠한국 박상건 기자] 한적한 바닷가를 걸으며 조용히 삶을 반추하는 사색의 여행 코스로는 겨울바다가 제격이다. 교통편이나 해수욕장의 왁자지껄 소음이 사라진 바다에는 파도소리와 갯바람뿐이다. 느림의 미학이 무엇인지, 무심히 백사장의 길을 내는 고둥의 길을 따라가거나 수면 위로 툭, 툭 뛰어 오르는 물고기들의 모습을 보면 안다.
갯바위에 칭칭 매인 해조류는 푸른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칭얼칭얼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며 갯물에 행구는 모습도 싱싱한 갯바람만큼이나 청초한 겨울바다 풍경 중 하나다. 그렇게 여행자와 자연은 서로의 언어는 달라도 한 물결로 소통하며 겨울 바다 풍경화의 주인공이 된다.
겨울바다를 걸으며 뒤안길과 걸어가야 할 세월들을 그려보며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위로 사뿐사뿐 내딛는 걸음마다 푹신푹신 스펀지 같은 감촉에 온 몸에 전율돼 왔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날 기온은 영하권으로 뚝 떨어졌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옹진농협 관계자와 농협 소속 고향주부모임 회원들과 만나 승봉도 가는 길에 함께 했다. 일행은 설을 앞두고 어르신들 이발을 해드리고 영정사진을 찍어주러 가는 길이었다.
인천 앞 바다는 온통 안개로 가득했다. 파라다이스호 선장은 찌푸린 날씨만큼 눈주름을 잡아끌며 연안부부 선박 사이를 서서히 빠져나갔다. 선장은 나에게 “오늘은 또 어느 섬을 가세요?”라고 물었다. “농협에서 설을 맞아 승봉도 어른들 이발해드리려 가는데 동행 중”이라고 했다. 그는 다시 “우리 회사에서도 고향 분들을 위해 요금을 20% 할인해주기고 있다”면서 향토 섬 승봉도에 대한 애정을 표했다.
여객선은 서서히 안개바다 인천항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 힘차게 포말을 퍼 올리며 속도를 높였다. 인생도 그런 것이다. 산다는 것은 때로 안개바다를 가다가, 서로가 훈훈한 등불을 켜며 동행하는 길이다. 그런 인지상정의 인생을 사랑이라 부르곤 한다. 사랑의 희열이 안개처럼 깊어지는 순간을 행복이라고 부른다. 행복은 살면서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다른 두 가슴이 한마음으로 출렁이는 것이다.
여객선은 무의도, 자월도 지나 이작도, 소이작도 해협을 빠져 1시간 30분 만에 승봉도 포구에 도착했다. 승봉도는 인천연안부두에서 50km 떨어져 있다. 인천시 옹진군 자월면에 딸린 섬으로 면적은 2.22㎢, 해안선 길이는 9.5km다.
승봉도는 섬 모양이 하늘로 승천하는 봉황을 닮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다. 섬은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신 씨와 황 씨가 함께 고기를 잡던 중 풍랑을 만나 대피했던 섬으로 알려졌는데, 신 씨와 황 씨의 성을 따서 신황도로도 불렀다.
승봉도는 작아서 더욱 아름다운 섬이다. 주요 교통수단은 경운기와 승합차다. 논두렁 밭두렁 사이 나지막이 깔린 길과 동행하며 옹기종기 모인 마을이 참 평화롭고 정겹다. 섬인데도 오래 전부터 물 좋고 먹을 것이 많았고, 산세가 수려해 축복 받은 땅이다. 걸어서 다 돌아볼 수 있는 해안 일주도로와 전교생이 4명뿐인 승봉초등학교 분교도 작아서 아름다운 이유가 무엇인지 보여줬다. 소담한 승봉도는 다른 농어촌과는 달리 귀향 인구가 늘고 있다. 2020년 1월 현재 234명이 거주한다. 10년 전에 비해 3배 늘어났다.
주민들은 승봉도 청정해역에서 우럭, 꽃게, 소라, 굴을 잡고 농사도 짓고 민박도 하는 옹진군 대표적인 향토관광마을이다. 주민들 표정도 유난히 밝은 점이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해변 곳곳에 아낙들과 여행객들이 어울려 소라, 고동, 바지락, 낙지를 잡는다. 배를 타고 조금 더 나가면 우럭과 노래미가 많이 잡힌다.
마을회관은 모처럼 웃음꽃이 만발했다. 할머니들은 자원봉사 미용사들 손을 꽉 잡으면서 “아이구, 추운디”하면서 반겼다. 청년회원들도 이 참에 머리를 손질하고자 함께 했다. 3시간 후면 막배 식산이라서 저마다 손놀림이 민첩했다.
미용과 영정사진 촬영 후에는 주민들이 모여 마을 현안에 대한 토론을 했다. 승봉도 명소인 이일레해수욕장 바위가 드러나 심각하다는 것이다. 1,3km 해변이 모래 채취 후유증으로 생태변화가 일어났다. 하얀 백사장과 울창한 숲이 병풍을 친 해변은 급속한 모래유실로 어장피해가 잇따랐다. 백사장은 예로부터 주민들이 소를 데려와 쟁기질 훈련을 시켰던 곳이다. 소들에게 일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해서 사투리로 이일레라고 부른다.
모래는 지름 0.02∼2mm 사이 암석조각을 말한다. 크기와 생김새에 따라 명칭이 다양하다. 퇴적 장소에 따라 산사, 강사, 해사, 사구사, 화산회사 등으로 나눈다. 우리나라 대표적 모래섬은 옹진군의 덕적도, 승봉도, 이작도, 태안군의 안면도와 태안반도 사이 죽도다. 이들 섬은 조개, 꼬막이 많았으나 잇따른 모래채취와 간척공사로 육지가 된 해안선이다.
바다에서 모래를 채취하는 선박을 준설선이라 부른다. 바다 모래의 운명이 엇갈리는 것은 건설현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가 모래이기 때문이다. 건물 용도에 따라 점토와 모래, 시멘트와 모래를 배합해 기초공사를 다진다.
태안반도와 옹진군 섬은 바다 모래 주요 채취지역이다. 채취량이 50만㎥ 이상일 경우 환경영향평가를 받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업자들은 채취 면적을 분할해 신고함으로써 법망을 빠져나간다. 그런 사이에 해양자원이 고갈되고 어장이 서서히 파괴되어 가는 것이다.
모래가 씻겨나가면 미생물과 플랑크톤이 서식지가 파괴돼 해양 먹이사슬이 끊기고 조개와 물고기 등 서식공간이 사라진다. 그리고 바닷물이 해안선을 파고들면서 섬 주민들의 식수난까지 초래한다. 실제 덕적도 등 민박과 펜션을 운영하는 섬 주민들이 짠물이 논과 밭으로 유입하는 등 문제로 휴가철 식수난으로 영업을 중단해야 했던 적도 있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 해양자원을 파괴하는 순간 후손들의 해양문화 공간, 해양자원 공간은 그 이상의 손실과 비극을 낳는다. 우리 해양환경의 중요성을 더 강조해서 무엇 하랴.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솔향기 야생화가 지천으로 핀 솔숲을 거쳐 남동쪽 끝자락의 부두치 해변으로 갔다. 파도가 많이 부딪힌다 해서 ‘부디치’라고 부른다. 모래와 자갈, 조개껍데기가 섞인 신비로운 해안이다. 그 앞에 작은 돌섬 하나 있었는데 밀물 때는 섬처럼 보이고 썰물에는 모래톱이 드러난 삼각지대다. 이곳에서 여행객들은 바지락을 캘 수 있고 민박집에 가져가면 큰솥단지에 장작불로 삶아준다.
버끈내 해변의 남대문바위는 해안선에 수평으로 구멍이 나있다. 바위모양이 남대문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코끼리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물음에 동행한 주민은 “우리도 그리 생각하는데, 복잡한 세상에 이름 바꾸려면 몇 십 년은 걸릴 것”이라며 웃었다. “당시 섬사람들은 서울에 갈 수 없고 바위 아래 드나드는 문의 역할만 생각해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사랑하는 연인이 다른 섬으로 시집가려 하자 두 사람이 이문을 넘어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고 해서 전해지면서 젊은 여행객들이 이 문을 지나며 사랑을 꿈꾼다. 바로 옆 섬모롱이에 촛대를 닮은 촛대바위가 있다. 남해안 홍도 촛대바위보다는 작지만 섬 끝자락 풍경에 운치를 더해준다.
부채를 닮은 부채바위는 햇살이 쏟아지면 황금색으로 보인다. 옛날 유배생활을 달래며 이곳에서 시를 썼고 다시 유배가 풀리고 장원에 급제했다는 설이 전해지면서 고시생과 수험생들이 자주 찾는다. 승봉도 바로 앞에 배로 5분 거리에 있는 사승봉도는 광활한 은빛 백사장이 이국적이다. 이 무인도에 물이 빠질 때 노을 풍경이 장관을 이룬다.
문의: 자월면사무소(032-899-3406)
글・사진: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