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대한민국 체육 100년 명장면① 한국 체육의 태동기, 그리고 최초의 기록들

[창간특집] 대한민국 체육 100년 명장면① 한국 체육의 태동기, 그리고 최초의 기록들

  • 기자명 이상민 기자
  • 입력 2019.11.21 14:57
  • 수정 2019.11.2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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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식에서 YMCA 총무 이상재(오른쪽)가 시구를 하고있다. (사진=대한체육회)
제1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식에서 YMCA 총무 이상재(오른쪽)가 시구를 하고있다. (사진=대한체육회)

[데일리스포츠한국 이상민 기자] 21세기 대한민국은 세계 스포츠 강국으로 떠올랐다. 굵직한 대회를 유치하는 것은 물론 좋은 성적도 올렸다. 시작은 1920년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가 설립된 후 부터다. 이후 처음 전국체전이 시작됐고 체육발전에 초석이 돼 스포츠 인프라를 넓혀갔다. 현대에는 스포츠와 국민이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국민들을 울리기도, 웃기기도 하며 희로애락을 함께 했다.

또한 위상을 높이는 수단으로도 작용했다. 과거 박찬호와 박세리가 그랬고 현재는 손흥민과 류현진이 그렇다. 이에 데일리스포츠한국은 창간 6주년을 맞아 한 세기 동안 한국 스포츠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1920년 <제1회 전국체전 개막식>

우리나라는 세계 스포츠 강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동·하계올림픽과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 세계 4대 스포츠 행사를 모두 개최하는 것은 물론 올림픽 10위권 달성, 월드컵 4강 진출 등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한국 스포츠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매년 가을 전국 시도 대항으로 열리는 전국체육대회가 있다.

전국체육대회는 1920년 11월 조선체육회가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개최한 제1회 전 조선야구대회를 기원으로 삼는다. 이 대회는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 창설 이후 열린 첫 대회이다. 1회 대회 이후 점차 종목의 폭을 넓혔고 1948년에 열린 제29회 대회 때부터 전국체육대회로 이름을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박태환, 진종오 등 여러 올림픽 메달리스트들도 전국체육대회를 거치며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 했다. 올해로 100주년 맞은 전국체육대회는 35년 만에 서울에서 열리며 그 의미를 더했다.

사진: 제1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식에서 YMCA 총무 이상재가 시구를 하고 있다. 이는 가장 오래된 시구이다.

1936년 씁쓸한 손기정의 <독일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손기정은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 11회 올림픽 마라톤 부분에 일본 국기를 가슴에 달고 경기에 나섰다.  (사진=대한체육회)
손기정은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 11회 올림픽 마라톤 부분에 일본 국기를 가슴에 달고 경기에 나섰다.  (사진=대한체육회)

손기정은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까지 활약했던 육상 선수로 체육계 전체를 상징하는 전설이자,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또한 비운의 금메달 리스트로도 불린다.

손기정은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렸던 제11회 올림픽 마라톤에 일본 국적으로 출전했다. 당시 2시간 29분 19초의 기록으로 인간이 넘기 힘들다던 마의 2시간 30분 벽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기쁜 기색하나 없었다.

시상대 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국가가 나오자 고개를 푹 숙였고 메달과 함께 받은 월계수관으로 자신의 가슴에 있는 일본 국기를 가렸다. 비록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따낸 메달은 아니었지만 일제 강점기 속에서 한국인이 따낸 첫 메달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손기정에 가려 주목받지 못 했지만 일본 국적으로 같이 출전한 남승룡은 동메달을 따냈다.

1948년 '한국'이란 이름을 달고 출전한 첫 올림픽과 첫 메달

역도 김성집은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해 우리나라 최초의 메달을 따냈다. (사진=대한체육회)
역도 김성집은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해 우리나라 최초의 메달을 따냈다. (사진=대한체육회)

1948년 런던 올림픽은 우리나라에겐 특별한 대회다. 일장기를 달고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한국이 ‘KOREA’라는 명칭으로 처음 참가한 올림픽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 대회에 선수 52명, 임원 15명 등 총 67명을 파견했다. 한국 선수단은 지구 반대편의 런던으로 가기 위해 20일간의 긴 여정 끝에 대회에 참가했다.

한국의 올림픽 첫 메달도 런던에서 나왔다. 역도 75kg급에 출전한 김성집이 동메달을 따내며 세계무대에서 처음 태극기를 휘날렸다. 이어 권투의 한수안(플라이급)이 패자전에서 분투해 동메달을 추가했다. 한국은 태극기를 달고 출전한 첫 대회에서 동메달 2개로 종합 32위를 기록했다.

1954년 한국 축구 최초 출전 <제5회 스위스 월드컵>

한국 축구대표팀은 1954년 스위스에서 열린 제5회 월드컵에서 처음 월드컵에 출전했다.  (사진=대한체육회)
한국 축구대표팀은 1954년 스위스에서 열린 제5회 월드컵에서 처음 월드컵에 출전했다.  (사진=대한체육회)

전쟁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인 1954년은 한국 축구가 최초로 월드컵에 출전한 해다. 한국은 아시아 예선에서 일본을 1승 1무로 꺾고 첫 월드컵 출전 티켓을 얻었다.

본선경기 참가 팀은 모두 16개 팀. 그중 한국은 헝가리와 터키, 서독과 함께 같은 조에 속했다. 한국은 헝가리와 역사적인 월드컵 첫 경기를 치렀다. 당시 헝가리는 32경기 무패를 기록하는 강팀이었다.

한국은 멀고도 먼 유럽에서 헝가리와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0-9로 패했다. 터키에는 0-7로 졌다. 이미 8강 진출을 확정지은 서독과는 경기를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2패 무득점, 16실점으로 첫 월드컵을 마감했다.

이후 한국은 4차례 월드컵에 출전했지만 승리를 기록하지 못했고 2002년이 돼서야 월드컵 첫 승을 올렸다. 이는 처음 월드컵에 출전한지 48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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