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옥의 샤머니즘 이야기] 죽음을 준비하는 서른 날

[유명옥의 샤머니즘 이야기] 죽음을 준비하는 서른 날

  • 기자명 데일리스포츠한국
  • 입력 2019.10.28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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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스포츠한국] 주인공이 장로의 간곡한 청을 간접적으로 사양하자,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하)> 163쪽에서 장로는 주인공에게 “대사께서는 유리의 율법에 관해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가 고개를 저어 보이자, 장로는 혼잣말을 하듯이 “없으시겠지”라고 했고,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 “그러나, 이런 경우에 이르러서라면, 일러드리는 것이 필요한 일인 듯싶으구료”라고 했다.

장로 스스로는 자신이 굳이 이런 말을 주인공에게 전해야 하는 상황이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장로는 한 숨을 쉬었다가 침묵하고, 또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장로는 “유리에는 대사의 죽음이 준비되어 있소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장로는 좀 번들거리는 눈으로 주인공을 건너다보며, 떠는 목소리로 “대사가 돌아가 정죄받는 날로부터, 대사께서도 서른 날이 주어질 터인데, 그것은 죽음의 준비로서 주어지는 기간이외다. 유리의 율법은 스님들께 되도록이면 타의를 강요치 않으려는 것이 목적이라고는 한다더라도, 그러나 그 서른 날이 지나면 이제 거기 법의(法意)가 작용하게 됩니다”라고 했다.

유리의 율법은 거기에 파견된 스님 관리인 촛불 스님에 의해 유지되고, 집행되고 있다. 죄를 범한 범죄승은 그의 죄를 정죄받는 날로부터 서른 날이 다 가기 전에 그러므로, 자기의 날짜와 자기의 죽음의 방법이 자기에 의해 선택되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리의 율법은 어떤 스님이라도, 정죄받기 전에 유리를 떠나버리면, 사실 상 그것으로 끝인 셈이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권을 가지고 수도의 장로로서 유리를 선택해 발을 들여놓은 스님은 유리의 율법에 의해 “법과 질서의 보호를 일단은 포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또한, 유리라는 곳의 특수성으로 인해 그곳을 벗어난 지역은 스님 관리의 영역을 벗어나 버리는 것이므로 촛불 스님에 의해 집행되는 법의 역시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읽으며, 박상륭이 <죽음의 한 연구>에서 유리라는 가상의 공간을 상정했을 때 유리의 율법이 적용되는 장소의 한계를 규정한 까닭이 따로 있을 것 같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박상륭은 구도자에게 있어서의 살해와 일반인의 살인의 의미와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구도자가 수도 중에 범하는 살해는 ‘살불살조’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에 살해 행위를 “어떤 실체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자, 수행의 한 방편”으로써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

※ 여기 연재되는 글은 필자 개인의 체험과 학술적 자료를 바탕으로 집필한 개인적 견해이며 특정 종교와 종교인 등과 논쟁이나 본지 편집방향과는 무관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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