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 칼럼> 40년만에 제자리 찾은 부마민주항쟁

<김주언 칼럼> 40년만에 제자리 찾은 부마민주항쟁

  • 기자명 김주언 논설주간
  • 입력 2019.10.17 14:12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캄보디아는 300만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는 100만~200만명 희생시키는 것쯤 별 문제 있겠습니까?”(차지철 경호실장) “부마사태는 단순한 학생데모가 아닙니다. 460명 연행자 중 학생은 16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민란입니다. 체제에 대한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 때문입니다.”(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사태가 악화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박정희 대통령) 40년 전 부산과 마산에서 민중항쟁이 발생하자 박정희 전 대통령과 측근들의 대화내용이다. 당시의 긴박한 상황이 묻어난다.
1979년 10월16일. “청년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시 부산대 학생 정광민씨가 유신헌법 철폐와 박정희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유인물을 뿌려 부산대 시위가 촉발됐다. 선언문은 “식어가는 정열, 잊혀가는 희미한 진실, 이성을 다시한번 뜨겁게 불태우자며 청년학도들에게 분연히 진리와 자유의 횃불을 밝히자”고 역설했다. 5,000여명의 학생이 시위를 주도하고 시민이 합세하여 거리를 뜨겁게 달구었다. 불꽃은 마산으로 퍼져나가 부마민주항쟁으로 확산됐다. 열흘 뒤 10ㆍ26사태로 유신정권의 종말을 불러온 불씨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10월18일 부산지역에 계엄령, 이어 마산에는 위수령을 내렸다.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탱크를 동원해 진압했다. 계엄사는 1,500여명을 연행하고 120여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부마민주항쟁 발생 열흘만에 김재규 부장이 수습책을 둘러싸고 차지철 실장과 심한 언쟁을 벌였다. 김부장은 서울 종로구 궁정동 만찬장에서 박대통령과 차실장에게 총을 쏘았다. 궁정동의 총소리는 유신체제의 막을 내리는 신호탄이었다. 부마민주항쟁은 군사정권의 철권통치 18년을 끝내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0.26사태 나흘 전 김부장은 박태통령에게 부마민주항쟁 원인을 보고했다. “상인들은 세금 때문에, 시민은 잘못된 시정 때문에,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과 제약받는 노동권 때문에 시위에 뛰어들었다”는 것이 주요내용이다. 김영삼의원 제명으로 지역감정이 불거져 항쟁이 일어났다고 보고한 전두환 사령관의 보안사와는 정반대 입장이었다. 김부장은 ‘부마항쟁이 전국화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김부장의 의견은 외면당했고 보고서는 파기됐다. 부마민주항쟁이 유신체제 붕괴의 도화선이었음을 증명해준다.
당시 시위대 진압에는 전두환 사령관이 직접 관여한 사실도 밝혀졌다. 전 사령관은 시위 발발 이틀 뒤인 10월18일 부산을 방문해 진압부대를 방문해 조언하고 격려금을 전달했다. 당시 소장이었던 전씨가 상급자이자 진압부대를 이끌던 계엄사령관을 상대로 ‘조언’이란 명목으로 사실상 지휘권을 행사했다. 공수부대와 행정병력 배치부터 진압장비 사용방법, 합동조사본부 운영에 이르기까지 세부적 시위진압 방법을 논의한 것이다. 전 씨가 조언한 진압방식은 7개월 뒤 일어난 광주민중항쟁의 더욱 무자비한 진압으로 이어졌다. 
부마항쟁은 1960년 4.19혁명, 1980년 광주민중항쟁, 1987년 6.10시민항쟁과 함께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4대 민주화운동으로 꼽힌다. 하지만 역사적 평가나 제도적 기반, 관련자 예우 등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동안 기념행사도 부산과 마산에서 지역행사로 조촐하게 치러졌다. 따라서 대다수 국민은 부마항쟁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계엄 하에서  엄격한 사전검열로 언론보도조차 없었다. 게다가 관련 자료가 많이 사라져 추후에 진상을 밝혀내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부산지역에 계엄령이 내려진 뒤 8시간 만에 언론통제가 단행됐다. 계엄사 보도검열단은 부산시 공보실에서 사전검열을 실시했다. 신문은 인쇄되기 직전에, 방송은 속보를 내지 못하도록 수시로 검열했다. 검열지침은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국민여론을 자극하면 안 된다’, ‘국가이익에 위반돼선 안된다’는 식의 추상적이며 막연한 기준이었다. 결국 관련보도는 모두 통제됐다. 게다가 외신을 통해 거꾸로 국내에 알려질 것이 두려워 외신기자들을 미행하기도 했다. 영화 ‘택시운전사’를 통해 알려진 광주항쟁 당시의 외신통제도 미리 학습해둔 셈이다.
4대 민주항쟁 중 국가기념일에서 제외됐던 부마항쟁은 40주년인 올해 들어 공식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16일에는 정부 주관으로 경남 창원시에서 ‘부마1979, 위대한 민주여정의 시작’을 주제로 공식기념식이 열렸다. 때맞춰 항쟁주역들의 목소리를 담은 증언집 ‘다시 시월 1979’가 출간됐다. 부마항쟁을 조명하는 라디오 드라마도 방송중이다.  MBC경남이 제작한 ‘79년, 마산’이 그것이다. 순경 배달원 학생 등 실존인물들의 증언을 취합해 드라마로 구성했다. 11월1일까지 매주 월요일 아침 8시30분에 방송중이다. 
증언집은 평범한 학생으로 항쟁을 이끈 주역들의 인터뷰를 통해 사건의 흐름을 생생하게 담았다. 당시 거리로 뛰쳐나와 독재정권에 맞선 10명의 증언도 담겼다. 문화사적으로 본 부마항쟁사 연구와 재판기록을 통해본 항쟁의 의의도 탐색한다. 이 책은 학생들의 자발적 저항운동에 도시 주변부 빈민과 노동자 자영업자 등 민중이 자연스럽게 동참해 범시민운동으로 발전한 대규모 항쟁임을 강조한다. 지도부나 특정단체의 주도없이 민중이 자발적으로 참석했다는 점에서 2016년 촛불혁명이나 최근의 검찰개혁 촛불시위와도 닮았다. 
지난 10일에는 서울에서 ‘다시, 민주주의!’를 주제로 기념공연이 열렸다. 한홍구TV와 NCCK언론위원회 등이 주최한 행사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강연과 항쟁 참여자의 구술, ‘부마항쟁의 미래’에 관한 토크쇼로 진행됐다. 정희성 시인의 시 낭송도 이어졌다. 홍순권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장은 “부마항쟁 기념행사가 서울에서 열리기는 처음”이라며 “국가기념일 제정을 계기로 부마항쟁이 민주화를 이끈 역사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홍구TV는 31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3시 ‘한국을 뒤흔든 열흘-부마항쟁에서 10.26까지’를 방송한다. 
때마침 부마항쟁 이후 수십년 동안 전과자 낙인을 안고 살아온 관련자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아 명예를 회복하고 있다. 부산지검은 지난해 부마항쟁 관련자 5명을 직권으로 재심 청구해 무죄판결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6월에는 형사보상 청구자격이 없는 기소유예자 10명을 찾아 재수사하고 ‘혐의없음’ 처분을 내렸다. 이들은 구금일수에 따라 하루 30만원가량의 보상금을 받는다. 하지만 불법 구금과 고문에 대한 국가배상은 갈 길이 멀다. 국가배상청구 소멸시효를 놓고 재판부마다 다른 판단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부마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지만 남은 과제도 많다. 무엇보다도 진상규명이 시급하다.  참여자들의 단편적 증언기록은 있지만, 아직도 ‘나도 참여했다’고 떳떳이 밝힐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연행된 사람만 1,500명이 넘는데 신고자는 300명정도에 불과하다. 진상규명을 토대로 고문 등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배상과 보상도 이뤄져야 한다. 역사적 평가나 학술연구도 미미한 수준이다. 부마민주항쟁의 의미를 널리 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중앙정부의 적극 지원이 필요한 이유이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자 미래이다. 전호환 부산대 총장은 “40년만에 정부가 공식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고 정부주최 첫 기념식이 개최돼 정말 다행스럽다”며 “부산과 마산의 자랑스러운 민주화 전통과 역사, 정신이 시민 모두의 일상 속에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주언(논설주간ㆍ전 한국기자협회장)

저작권자 © 데일리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