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천 칼럼> 가을이어서 시를 읽는다

<정윤천 칼럼> 가을이어서 시를 읽는다

  • 기자명 정윤천
  • 입력 2019.10.10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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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가을이어서 시를 읽는다. 시를 읽어야 가을이고, 가을이므로 시를 읽기로 한다. 시를 읽어서 가을이 되리라. 최소한 시인들에겐 가을이, 가을이 오는 일이 그리 되어야 하리라. 가을과 시여. 가을만이라도 그래야 하고 이 가을만이라도 어쩌면 그래 주어야 하리라.
지난여름은 우리에게 아무 일도 주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차라리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에겐 단 한 줌의 아름다움도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거기 단 한 편의 시도 쓰여지지 아니하고 말았습니다. 세간의 지붕들마다에는 창날 같은 서릿발이 올라서 염천의 볕에도 녹지 않았고, 창들은 저마다 고래의 물줄기 같은 붉은 피의 기둥들을 피워 올렸습니다. 아무도 스스로를 반성하지도 내다 버리지도 않았고, 서로의 머리카락들을 쥐어뜯기에 바빴으며 급기야는 그 머리카락들을 썰어 담아서 독이 담긴 저주의 기름들을 짜내기에 바빠 보였습니다, 흰 자위들 검은 동공들의 사이로는 핏발이 서려 버렸습니다. 미워하고, 미워하고, 미워하여, 일곱 번도 넘게 아홉 번 씩이나 미워한 뒤에, 미움의 대서양과 태평양을 이루었습니다. 저주와 원망의 부리들로 병든 물고기들을 쪼아 저마다의 거룩한(?) 배때기들을 채우기에 급급하여 보였습니다.
 부디 누구에게도 지금은 함부로 구원의 밧줄이 닿지 않게 하소서. 서광도 희망도 비추이지 않게 하소서.
그러니 이제 그들의 몰염치와 몰지각들을 뒤로 하고 가을이 오려고 한다. 가을이 막무가내 무작정의 얼굴로 오고 있는 중이다. 아무렴, 가을이, 가을이라고 어디에서 제 멋대로 생겨나서 이리로 오는 일이었을까. 내심을 숨겨 놓고 표정만이라도 우선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을까. 아마도 가을은 지난여름들의 진실과 속셈들을 다 헤아리고 살펴서 마침내 오고야만 될 사필귀정의 계절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가을의 초입에서도 그러나 여전히 필자로 하여금 우리들의 세간을 읽어내는 일은 슬프고 우울합니다. 그러니 돌아앉아서 시라도, 아니 시만을 읽기로 해야 하겠습니다. 시집을 한 권 챙겨 듭니다. 시집의 제목이 어쩌면 이렇게도 이러 합니다. “슬프다 풀 끗헤 이슬” 송재학이라는 시인이 펴낸 시집입니다. 가까이서 잘 알지 못하는 시인이고, 그러나 그의 시는 나름대로 깨친 점도 없지만은 않았던 시인입니다. 시인과는 이 가을의 어느 시의 벤치 위에서 한번쯤 아는 체 하면서 지나가기를 바라도 좋을 그런 시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뜻밖에도 시집의 제목이 1935년에 발간된 옛 책에 실려 있는, 한 편 글의 제목이라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의 궁핍한 시인 진명의 이야기”를 다룬 글의 제목이라고 일러 줍니다. 옛 글의 제목으로 자신의 현재 시집의 제목을 삼은 염치(?)가 이 시인의 높이이자 넓이라고 생각하니, 필자는 시집의 제목 앞에서 부터 우물쭈물 작아지는 가슴입니다. 아마도 필자가 지나쳐 왔던 수많은 시집의 제목들 중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안겨 주었다는 수줍은 고백을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수국 곁에 내가 있고 당신이 왔다 당신의 시선은 수국인 채 나에게 왔다 수국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잠깐 숨죽이는 흑백 사진이다 당신과 나는 수국의 그늘을 입에 물었다 정지 화면 동안 수국의 꽃색은 창백하다 왜 수국이 수시로 변하는지 서로 알기에 아슬한 꽃무늬를 얻었다 한 뼘만큼 살이 닿았는데 꽃잎도 사람도 동공마다 물고기 비늘이 얼비쳤다 같은 공기 같은 물속이다.”  ‘취산화서’ 전문.
제목은 어림짐작 하겠는데, 시의 내용은 얼얼하다 못해 얼떨떨해지는 마음이다. 꽃나무가 꽃을 득하는 순서라고 하였으니, 시로 걸어 들어가는 단초는 거기에 있을 것도 같았다. 언제 어디선가 “당신은” 아니다 “당신의 시선은” “수국인 채 나에게 왔다” 그러니 나는 내게서 “수국”부터 피어났던 것인가. “숨죽인 흑백 사진”이 그 다음에 와서 피고. 이제 당신과 나는 “수국의 그늘을 입에” 무는 차례가 되었다. 누구나 꽃 앞에서 흔히 하는 행동이거나 관습으로 비추이지는 않는가. 화서지간 중에서도 일어나는
 “정지화면”의 동안, “수국의 꽃 색은 창백하다” -실제로도 수국의 꽃 색깔은 토양의 성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걸로 알려져 있다. 변하는 걸 아는 당신과 나는 비로소 “꽃무늬”를 얻는다. “물고기 비늘 같은” 꽃무늬를, 수국의 꽃무늬가 물고기의 비늘이고, 물고기의 비늘이 수국으로 피어나는 비현실의 시공을, 어쩌면 시인은 꽃 차례에 실어 걸어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고 통쾌한 순간이 하나 아직 남아 있다. 당신과 나에게로도 그럴듯해 보이는 변장을 두르고서 피어났던 꽃떨기의 이름은 종국에 이르러 수국(水國)으로 화한다. “공기 같은 물속” 이 세상의 모든 수국들의 무덤이자 시작이었던 게다. 수국이 수국으로 화하는 원리의 순간이 이 시에는 있었다.
시인의 작시 의도에서 애초부터 크게 벗어나 있었는지 모릅니다. 괜찮다고 우기려고 합니다. 저 시에 도사린 희미한 관능들과 저 시구들이 도치하는 유별난 표현의 체계에는 다분히 오독의 기미를 미리서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슬아슬 높아 보이는 한 편의 시를 바닥으로 끌어내려서 세간의 눈치이거나 망치질로 때려잡아 보려하는 이 순간이, 내게는 다만 시를 읽는 가슴의 동계로만 유의미한 경우 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내게로는 이 세간의 불가해들을 헤아리게 하는 지혜를 주었으면 더 좋으리라는 생각을 지녀 봅니다. 당신도 그대의 가슴에서 한 편의 시를 꺼내어 저처럼 틀리면서 읽어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그리고 가을입니다.     

정윤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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