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 칼럼> 검찰·언론 권력의 탄생과 야합

<김주언 칼럼> 검찰·언론 권력의 탄생과 야합

  • 기자명 김주언
  • 입력 2019.10.01 17:25
  • 수정 2019.10.0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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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스포츠한국 김주언 ] 지난 주말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주변에 운집한 100만 촛불의 외침은 검찰과 언론의 개혁이었다. 참석자들은 검찰청사를 겹겹이 포위한 채 검찰과 언론 개혁을 요구했다. 2016년 광화문광장을 물들인 탄핵촛불이후 최대 규모이다. 두 달 가까이 이어진 ‘조국 대전’이 정치권의 막말 정쟁을 넘어 시민의 분노로 표출된 것이다. 조국 법무부장관 가족에 대한 검찰의 먼지털이식 과잉수사에 대한 분노가 검찰개혁요구로 전환됐다. 검찰이 흘린 피의사실을 받아쓰는 ‘따옴표 저널리즘’은 언론개혁의 당위성을 시민에게 각인시켰다.

김주언 논설주간
김주언 논설주간

한국사회의 권력으로 등극한 검찰과 언론에 대한 분노는 강남일대에 몰아쳤다. 사법적폐청산 범국민시민연대는 “정치검찰은 철저하게 혁파돼야 하며 국민의 이름으로 반드시 단죄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민연대는 “검찰과 언론이 조 장관과 부인 정경심교수를 피의자로 몰아가고 있지만 이들은 사실 피해자”라며 “진짜 공동정범은 70년간 헌법과 국민 위에 군림하며 직권을 남용하는 검찰과 그들이 흘린 정보를 받아쓰는 언론”이라고 질타했다. 검찰과 언론의 야합이 ‘조국 사태’를 이끌어왔다는 지적이다.

‘대한민국은 검찰공화국이다. 모든 수사정보는 언론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를 패러디한 경구이다. 한국사회의 정치갈등은 서초동 검찰로 수렴된다. 정치권은 모든 갈등사안을 검찰에 넘겨 사법부의 판단에 떠넘긴다. 상대에 대한 막말이나 비난에 대한 의법조치를 검찰 손에 쥐어준 것이다. 검찰은 수사권과 기소권이라는 두개의 칼로 권력을 행사한다. 기소편의주의와 기소독점주의라는 날개까지 달고 있다. 누구한테도 견제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셈이다. 검찰은 여의도로 시선을 돌려 정치를 주무르기조차 한다.

검찰은 언론을 통해 국민과 만난다. 국민은 언론이 보여준 검찰을 바라볼 뿐이다. 국민은 정치인과 재벌 등 권력집단에 대한 검찰수사의 공정성과 중립성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언론은 국민의 입장에서 수사과정을 감시해야 한다. 그러나 언론은 언제부턴가 검찰과 한통속이 되어 있다. 검찰이 피의사실을 흘리고 언론이 받아쓰는 정보독점이 형성돼 있다. 두 기관이 이 과정을 통해 공생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언론은 정파적 이익을 앞세워 자신에 유리한 정보만 집중 보도한다. 두 권력기관의 야합이 탄생하는 과정이다.

검찰과 언론은 흔히 ‘선출되지 않은 권력(Power without Election)’으로 불린다. 선거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지 않았는데도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지방자치단체장, 국회의원과 지방의원 등은 투표로 선출돼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한다. 임기가 끝나면 표로 심판받고 시민사회의 감시와 견제도 받는다. 그러나 검찰과 언론은 선출되지도 않고 견제도 받지 않는다. 검찰은 대통령의 지시를 받지만 독립을 내세우며 반발한다. 심지어 일부 언론은 세습을 통해 권력을 후대에 넘기기도 한다.

과거 독재시절 검찰과 언론은 정권옹위의 첨병이었다. 검찰은 재야와 학생 운동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공안검사들은 중앙정보부나 안기부가 고문을 통해 조작한 간첩단이나 반국가단체들을 단죄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언론은 보도지침으로 통제를 받는 한편으로 스스로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자임했다. ‘땡전뉴스’가 대표적 사례이다. 이를 댓가로 수많은 특혜를 받기도 했다. 정권의 ‘당근과 채찍’에 놀아난 것이다. 권력과 언론은 유착을 통해 공생했다. 정권은 권력을 유지했고 언론은 성장했다. 국민의 기본권은 뒷전으로 밀렸다.

검찰과 언론이 권력으로 부상한 것은 민주화과정에서다. 1987년 6월시민항쟁으로 발생한 권력의 공백을 틈타 스스로 권력의 자리에 올라섰다. 통제에서 벗어난 언론은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경지에까지 올라서 ‘정치언론’이란 별칭을 얻었다. 자유를 넘어 방종에 가까운 힘을 가진 일부 언론은 ‘밤의 대통령’으로 불렸다. 심지어 주요 언론사주들이 모여 대통령을 뽑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비아냥까지 터져 나왔다. 다매체다채널 시대가 열리고 시민사회의 견제가 강화하면서 힘은 약화했으나 아직 권력에 대한 향수는 잊을 수 없다.

검찰의 권력은 민주화이후 강화했다. 이승만정권 때는 경찰이 정권유지의 첨병이었다. 친일경찰 노덕술의 활약(?)이 잘 말해준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중앙정보부(안기부)와 보안사 등 정보기관을 활용했다. ‘인혁당사건’ 등 수많은 조직사건은 이들이 고문을 통해 억지로 엮어낸 것이다. 검찰은 그대로 기소했다. 민주화이후 정보기관의 힘이 약화하면서 검찰이 최고의 권력을 향유하게 됐다. 검찰은 정권의 입맛에 맞는 수사로 비판세력 옥죄기에 나섰다. ‘검찰동일체 원칙’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워 권력을 공고화하고 유지하는 데 골몰했다.

권력화한 검찰과 언론은 각자의 영향력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 손을 잡았다. 두 권력기관의 밀월관계는 독점권한을 주고받는 형태로 맺어졌다. 검찰은 수사정보, 언론은 정보전달 채널을 독점한다. 검찰과 언론의 공생관계는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성사됐다.

검찰은 언론에 정보를 흘리며 수사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조직에 이득이 되면 언론을 통해 여론의 관심을 일으켜 키웠다. 해롭다고 판단하면 여론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 덮었다. ‘죽은 권력’은 죽이고 ‘살아있는 권력’에 맹종하는 수사는 언론플레이를 통해 이뤄졌다. 검찰은 자신의 일방적 주장을 언론플레이를 통해 기정사실로 만든다. 이를 통해 피의자를 압박하고 재판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라설 수 있다. 언론이 범죄자라는 낙인을 찍으면 법원으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아내기 쉽기 때문이다.

언론은 검찰로부터 얻어들은 정보를 먼저 보도하면 서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 사실 확인과 검증책임을 회피할 수도 있다. 검찰은 언론의 입맛에 맞게 수사 방향과 속도를 조절한다. 언론사의 부정을 축소하거나 눈감아 주기도 했다. 두 권력기관의 공생이 야합을 넘어 유착관계로 이어졌다는 의심을 사는 이유이다.

두 권력기관의 공생이 빚어낸 최악의 비극은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이다. 이명박 정부의 검찰은 ‘죽은 권력’인 그를 겨냥한 수사에 나섰다. 보수언론은 혹독한 수사를 재촉했다. 진보언론조차 합류했다. 검찰은 ‘논두렁 시계’ 등 피의사실을 흘리며 노 전 대통령 망신주기에 나섰다. 결국 검찰과 언론의 야합이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조차 ‘검언유착’이 만들어낸 기본권 유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셈이다.

검찰과 언론은 상호의존 구도에서 벗어나 서로 견제해야 한다. 각자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담합구조는 이제 더이상 설 땅이 없다. 언론은 검찰이 흘려주는 무분별한 정보를 받아쓰는 데서 벗어나야 한다. 수사가 특정인을 겨냥하거나, 봐주기로 끝나거나, 인권을 무시한 과잉으로 치닫지 않도록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한다. 검찰도 불법을 저지른 언론사와 언론인을 봐주기 수사로 넘겨서는 안 된다. 두 권력기관이 야합과 유착에서 감시와 견제로 전환한다면 국민의 개혁요구도 잦아질 것이다.

시민사회의 요구에 이어 대학 교수와 연구자들, 종교인들도 검찰과 언론의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문재인 대통령도 검찰개혁을 지시하고 나섰다. 검찰개혁이 담긴 사법개혁 법안은 국회에 계류돼 있다. 그러나 법만으로는 진정한 개혁이 이뤄졌다고 하기 어렵다. 검찰 스스로 뼈를 깎는 자성이 필요하다. 반면 언론개혁은 지난한 과제이다. 자칫 정부가 나섰다가는 언론탄압이라는 역공이 들어올 게 뻔하다. 언론단체와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사회적 합의기구에서 개혁방안을 마련해 시행하는 방안을 고려해봄직하다.  김주언(데일리스포츠한국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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