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스포츠한국 서성자 기자] 시험 점수에 목매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들을 반 수 대로 몇 명씩 나누고 교실과 담임도 바꾸어 평가를 하던 7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90점 이상은 금상, 80점 이상은 은상, 70점 이상은 동상을 주었다.
금상, 은상, 동상이 몇 명이냐에 따라 학부모들은 담임의 능력을 은근히 평가하기도 했다.
평가는 요즘 수능이 무색할 정도로 철저한 보안 아래 이루어졌다.
따라서 담임과 아이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3학년을 담임했던 그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험이 끝나고 전 직원이 교무실에 모여서 채점을 하게 되었다. 작은 잘못도 용납이 안 되었기에 선생님들은 채점에만 온 신경을 썼다. 교무실에는 시험지 넘기는 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서명종이 누구예요? 다 틀린 문제를 이 얘 혼자 맞았네”
우리 반 시험지를 채점하던 윤 선생님이 신기해하며 말했다. 국어, 산수, 사회, 자연, 도덕 등 모두 100점을 맞았다. 음악, 미술, 체육, 예체능 시험지 한 장만을 남겨놓게 되었을 때는 모든 선생님들의 관심이 온통 우리 반 채점으로 쏠렸다.
드디어 마지막 문제까지 동그라미가 쳐지고 만점임이 밝혀졌을 땐 다른 선생님들이 더 좋아했다.
그 학교 개교 이래 처음 나온 만점이라고 모두들 흥분했었다. 요즘은 그 어려운 수능까지도 만점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만점은 정말 보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5년이 넘은 내 교직 생활 중에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만점을 받은 명종이는 내 먼 친척이기에 나 또한 기분이 더욱 좋았다. 성적표의 모든 과목에 100 점을 써 내려 갈 때는 손이 떨리기까지 했다.
성적표를 받아본 명종이 아버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담임인 내게 전화를 했다. 면직원인 그 분은 평생 번 돈을 책 사고, 술 사는데 다 썼다는 문학가이었다. 집안 살림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분이었기에 명종이 어머니가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다.
명종이 아버지는 한 턱을 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극구 말렸다. 그 댁의 형편을 아는 터라 오히려 내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서 선생, 내 기분이 그게 아니야. 나 말리지 말아줘.”
한껏 기분이 좋은 그 분은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한 턱을 내셨다.
전 직원 친목회 날 맥주 상자와 불고기, 전, 김치를 챙겨 들고 오셨던 그 분들.
선생님들은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모두들 맛있게 드셨다. 명종이 어머니의 맛깔스런 솜씨가 그 빛을 더했던 것이다.
10년 쯤 지나서 그 애가 S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40 대가 되어있을 명종이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지금도 가끔 환호하던 그 애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
“내 기분이 그게 아니야, 나 말리지 말아 줘”
<다방에서 받은 촌지> - 1
새 학년을 담임한 3월 초 어느 날 오후.
“1학년 2반 서성자 선생님 교무실에 전화 왔습니다”
교실 스피커에서 교감 선생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시절엔 교실에 인터폰이 없던 때였다. 나는 긴 복도를 소리 나지 않게 종종거리며 달렸다.
“전화 바꾸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 호헌이 아빠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교문 옆 홍실 다방으로 잠깐 나오실 수 있는지요?”
교감 선생님께 나갔다 와도 되냐고 말씀 드렸더니 경찰관 학부모가 보자고 하는 걸 보니 큰일 난 거라며 놀리셨다. 다방을 향해 걸으면서도 무슨 일인지 못내 궁금했다.
호헌이는 2학년 때 내가 담임을 맡았던 아이였다. 그러다가 3학년이 되어 서로 다른 반으로 갈라졌다. 그런데 담임도 아닌 나를 왜 만나자고 할까?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호헌이는 공부도 잘하고 인물도 좋아 담임인 나도 욕심날 만큼 똘똘한 녀석이었다.
80년대엔 초등학교에서 마저 반장 선거가 없어지고 담임이 임명하던 때였다. 반장도 1학기, 2학기 두 명 뿐이기에 반장 임명은 정말 부담스러운 행사였다. 그러나 서슴없이 호헌이를 반장으로 임명했을 만큼 리더십이 뛰어난 아이이기도 했다. 그렇게 담임을 하던 작년에도 찾아보지 않던 아빠가 학년이 바뀌어 보자고 하는 것이 더욱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