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서성자의 추억열차] 1970~1990년대 교단일기

[동화작가 서성자의 추억열차] 1970~1990년대 교단일기

  • 기자명 서성자 기자
  • 입력 2019.09.04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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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에 체조하다!> - 1

[데일리스포츠한국 서성자 기자] 시골 운동회 때 난리가 났다. 무용 잘하는 진 선생님 때문이었다.

생전 보도 듣지도 못한 멋진 무용지도에 교사들까지 입을 벌렸다. 배우는 학생들도 신기한 지도에 잘도 따라했다.

“오메! 저렇게 하는 입장도 있었나?”

여러 명이 손을 엇갈려 잡고 방향을 바꾸어 돌며 들어가는 입장에서부터 시골 학부모들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솜씨라고는 개미 똥만큼도 없는 나와는 대비되는 진 선생님이었다. 진 선생님은 마스게임과 농악놀이 두 종목을 혼자서 지도했다. 운동회 날, 시골 할아버지들이 운동장으로 나와 춤을 추며 잔치판이 풍성해졌다.

그 시절에는 학부모들이 찬조금을 냈다. 그 내용을 긴 종이에 써서 본부석 천막에 걸어 놓기도 했다. 그 돈으로 학교에 필요한 물건을 사기도 하고 선생님들이 여행 가는데 보태기도 했다.

“와! 대단한 여 선생님이여!”

학부모들은 서로 다투어 찬조금을 내기에 바빴다. 바람에 휘날리는 찬조금액을 쓴 긴 종이가 운동회를 보는 학부모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학부모들의 칭찬과 호응에 깐깐한 교장선생님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렇게 능력 있는 진 선생님을 비롯해 여교사가 일곱 명이나 있어, 솜씨 없는 나는 그냥 있어도 되었다. 능력 없는 나에게 까지는 차례가 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학교로 옮기면서 내 고민은 시작되었다. 첫해는 여교사가 다섯 명이나 있어 그 때도 무용 못하는 나에게는 차례가 안 왔다.

그러나 그 다음 해에 이르러 드디어 내가 무용 지도를 해야만 했다. 세 명의 여교사들이 다른 학교로 옮겨갔고, 달랑 두 명인 여교사 중 한 명이 출산을 했기 때문이다. 혼자서 해 보려 애써봤다.

농악은 그런대로 어떻게 할 것 같았지만 마스게임은 어렵기만 했다.

‘무용강습이라도 받아둘걸’

그러나 무용강습도 부끄러워 가지 못한 나였다. 따라하는 능력도 부족한 나인지라 강습비가 아깝기만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진 선생님에게 전화를 했다. 도와 달라고. 그전에 진 선생님이 했던 무용을 많이 봤던 터라 도와주면 할 것도 같았다.

그녀는 흔쾌히 승낙했다.

달 밝은 밤에 동생의 자전거 뒤에 앉아 5km를 달려 그녀 집을 찾았다. 녹음기를 틀어놓고 몇 번이고 그녀를 따라 안무를 배웠다.

세월이 많이도 흘렀지만 오른팔과 왼팔을 올렸다가 내리기를 엇갈려 하는 무용 첫 동작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날 밤이 깊도록 진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무용을 익혔다. 그녀의 동작을 보며 깨알 같은 글씨로 그 동작을 일일이 적어 놓았다. 잘 그리지도 못하는 그림을 나만이 알아먹게 그리고, 나만의 언어로 써 넣었다.

‘그 전에 진 선생님이 무용 지도할 때 미리 익혀 놓을걸!’

그러나 후회는 항상 늦게야 찾아온다.

창밖의 달님이 뒤늦게 후회하는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가르치는 자도 배우는 자도 참 열심인 달밤이었다.

달이 많이 기울어져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말 고마워요!”

인사를 뒤로하고 동생이 탄 자전거 뒤에 올라탔다.

달밤에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머릿속으로는 아까 배웠던 무용을 순서대로 따라해 봤다. ‘준비운동’(마스게임 음악) 곡을 흥얼거리며 달렸다. 길옆의 코스모스가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 해 운동회는 진 선생님과 비교할 만큼은 아니어도 나름 잘했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런데 3년 쯤 후, 내가 누군가에게 안무지도를 해줬다는 사실!

음지가 양지 되는 순간이었다.

나만큼이나 무용을 못하는 정 선생님에게 말이다. 정 선생님은 무용보다는 미술에 소질이 있어 능력을 인정받던 교사였다.

산골 마을인 정 선생님 자취방을 찾은 것은 운동회 한 달 전이었다. 고민을 하소연하는 정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서였다. 정 선생님의 고민을 누구보다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에 단숨에 달려간 것이다.

진 선생님이 가르쳤던 것처럼 내가 가르치고 정 선생님은 자기 언어로 그 동작 하나하나를 그림으로 그리고 적어 넣었다. 농악놀이의 안무였다. 농악 놀이었기에 우리의 행동은 더욱 요란 했을 것이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정 선생님은 소고를 들고 치는 것도 잘 못했다.

기본적으로 소고를 들고 뛰는 동작부터 우린 정말 열심히 했다. 뒹굴기, 눕기, 지경놀이 등, 별별 동작을 같이 연습했다.

데일리스포츠한국 0904일자
데일리스포츠한국 090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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