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옥의 샤머니즘 이야기] 희망고문인 유리에서의 삶

[유명옥의 샤머니즘 이야기] 희망고문인 유리에서의 삶

  • 기자명 데일리스포츠한국
  • 입력 2019.09.02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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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스포츠한국] 유리에 머문 지 15일째가 되어 읍으로 떠나는 날도 비는 부슬거리며 그치지 않고 있어서, 주인공에게는 유리가 비실재적이며 추상적인 공간인 듯 했다. 유리의 마른 늪은 형체를 잃어버린 어둠과 운무에 휩싸여 그의 눈앞에 신기루처럼 나타났다가 저 멀리 사라지곤 했다.

그럼에도 그의 현존을 실감하게 하는 향수 어린 하나의 얼굴이 남아 있었으니, 영혼의 누이 같은 수도부였다. 그녀는 그를 동구 밖까지 배웅해 주며, “오열에 흐드러진, 그러면서도 그것을 짓누르고 일어서려면서 해맑게” 웃어주었다. 그녀를 향한 그의 애틋한 향수는 “저 유계(幽界: 저승)를 뒤돌아보지 말았어야 되는 그 이승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그는 결국 유리를 떠난 것이었다. 읍에 가까워지면서 그의 마음속에서는 떠나는 슬픔과 도착에의 가슴 두근거림이 동시에 일었다. 그는 유리를 떠나 두세 식경을 걸어 병야(丙夜)가 되자 눈을 들어 정적하고, 적막하고, 삭막하고, 소삭하고, 소조하기만한 이울어지는 달빛을 올려다보았다.

그 곳에는 올빼미 까지도 두려워 울지도 못하는 맹렬한 적막이 흐르는 빈 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 곳 한 가운데에 서 있자니 그는 몽환 속을 끝없이 허청허청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과 동시에 자신의 해골을 떼어내 옆에 끼고, 머리 없는 몸으로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불현 듯, 그에게 복음도 광년(光年) 같은 것이어서, 이천 년 전쯤에 한 번 반짝했던 빛이, 이천 년 다 지나서야 보여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에게는 그러한 빛의 줄기는 일종의 희망으로서 쏠려드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유리의 마른 늪에서의 물고기 낚시질은 그에게 삶의 희망이면서 동시에 고문으로 변해져 있었다. 그는 사람의 아들인 구주를 떠올렸다. 그는 “어찌 자기를 버리느냐”며 깊이 탄식하며 죽어갔다. 인간에게는 완전히 절망할 수 없을 때 고통이 따른다.

그는 극락이란 저승에 향해서 고문으로 던져진 것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인간은 덧없는 영혼의 희망에 의해서 “학대당하고, 비참하며, 구원에의 확신이 없을 때, 죽음이 가장 큰 두려움으로 화한다”는 것을 이미 숱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의 삶이란 끊임없이 반복되는 희망고문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계속)

※ 여기 연재되는 글은 필자 개인의 체험과 학술적 자료를 바탕으로 집필한 개인적 견해이며 특정 종교와 종교인 등과 논쟁이나 본지 편집방향과는 무관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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