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천 칼럼> 이것은 사과의 이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정윤천 칼럼> 이것은 사과의 이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 기자명 정윤천
  • 입력 2019.08.29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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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부사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사과의 품명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며, 물론 나주목사 함경부사와 같은 벼슬아치의 권위를 수식하는 용어에 대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잠시 잠깐이나마 문장의 품사에서의 부사(副詞)어를 환기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한다. 더 멀게는 돕는다는, 조력한다는 풍성하거나 여유를 갖게 한다는 의미들의 순간에게로 눈길을 돌려 보기로 한다.       
사물에는 제각각의 이름들이 있다. 그것들은 불려지기 위해 있기도 하고 존재하기 위하여 혹은 존재만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를 명사라고 칭한다. 명사를 대신하는, 그와 그대와 너라는 등등의 말들이 대명사이다. 여름 막판에 욱일승천(?)에 해당되는 국민 또라이의 대명사가 되었던 이는 전 에스라인 선두 대학의 교수를 지냈다던가 그랬다던가 한다는, 이 아무개란 사람으로 여겨진다. 이런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별로 흔하지도 않아서 명사가 대명사로 바뀌는 변신의 경지를 보여주는 예로 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국민들의 감정선 위에 불이 붙은 휘발유를 끼얹은 듯한 한국과 일본의 총성만 들리지 않을 뿐인 전선의 열기 속으로, 지금의 그와 그들은, 혹은 그들과 그는, 어쩌면 아무도 눈치 챌 수 없는 그와 그들끼리만의 무시무시한 노이즈 마케팅을 강행하고 있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행태들은 더 이상 정의로운 차원에서 두고 보거나 방치해선 안 될 사안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막상 많은 사람들이 화를 내고 경원할수록 그들과 그는 과업(?)의 성과를 초과 달성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와 그들과, 그들과 그가 더더욱 오리무중의 무서움 내지는 간악함을 내재한 이유일 수 있겠다. 
언제부턴가 우리들은 ‘괴물’이라던가 ‘당근’이라는 식의 이름과 의미들의 바꾸어 말하기의 관행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는 듯한 모습이다. 대명제국이 아니라 대명사 천국이 이루어진 징후이다.
이에 반하여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부사는, 문장의 일체들을 수식하는 주어가 아닌 수식어이다. 부사는 그 종류마저도 각양각색 다양한 편이다. 성분을 꾸며 주는 성상 부사 (매우, 빨리, 세게). 시간이나 장소 등의 대상을 가르키는 (일찍, 이리저리. 내일, 이미)의 지시 부사. 빈도를 나타내는 (항상, 거의, 늘) 빈도부사 이외에도 부정, 의성, 의태, 접속 등등의 부사들이 존재한다.
금방, 얼른, 함께 등과 같이, 우리가 쓰는 모든 말과 문장에는 부사의 존재가 살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부사가 없이는 말과 문장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것과 같다는 뜻일 수 있었다.
지혜의 숲 출판사에서 발간한 “지적인 삶을 위한 글쓰기” (저자 차오름)에서 보면, “부사처럼 살고 싶다”라는 이색적인 장(章)이 놓여 있다. “솔직하고 명쾌하며 늘 긴장 속에 산다. 겉으로 보면 생각도 없는 것 같다. 깊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느끼는 대로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모든 품사들을 웃게 만들고 조롱할 수 있는 품사이다. 크기와 강도, 방향과 시간, 거침과 부드러움을 담당하는 이 품사는 문장 속에서 가장 자유롭다”라는 말로 부사의 영역과 존재감을 규정하고 있다. “부사처럼 살고 싶다” 라는 매우 상징적인 제목 역시 이 글의 논지를 한층 깊은 곳으로 인력하며 있었다.
한 가지만 더 살펴보자면, 부사의 반대말은 ‘숫자’라는, 퍽이나 유의미한 문장이 있었다. ‘금방’이라는 말을 숫자로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숫자는 그렇게 숫자일 뿐이어서, 어떤 상황의 느낌이나 흐름, 저간에 이루어지는 접촉적인 관계들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풀이이다. 그렇게 세간에는 거두절미의 숫자적인 발언들이 난무하고 있기도 하는 셈이다. 그러나 숫자와 숫자들이 겨우 나타낼 수 있는 지점은 눈금이나 표시 개개의 개수 정도일 뿐이었다. 부사에는 또한 강조와 접속의 관계들이 내재한다. 이러저러한 상황의 관계들의 그 구성의 요소들을 밑으로 가라앉히기도 하지만, ‘매우’ 혹은 ‘세게’와 같이 순간의 의지들을 돌올하게 부각시켜 떠오르게도 해주었던 것이다.
우리들도 혹시는, “부사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을까. 이 장의 말미에서처럼, “자폐적인 명사에게 개념의 세계를 넘겨주고, 멈출 줄 모르는 동사의 욕망에 지배받지 않고, 그리기만을 고집하는 형용사에 현혹되지 않으며”(부사처럼 살고 싶다에서) 그러면서 말이다.
알찍들 내어 보내리. 중간 중간에 불러들이지 않으리 눈꺼풀이 가물거려질 때나 한꺼번에 찾아오라 하리 그새 건달기를 풍기는 놈도 나무라지는 않으리 꺼들거리는 너에게론 통장을 털어주리 내가 지겨웠던 착실과장 자리보다 재미나게 생긴 곳으로 헤엄쳐 가보라고 하리 멸치전이나 새우장사가 아니라도 괜찮다 하리 한꺼번에 털어 먹어도 고래팔자라 여기라 하리 (중략) 공원이나 광장의 문지방 같은 곳에서 가늘고 가는 분수질이나 치다가 돌아가야 할 그간의 쓸쓸함에 대해서는 발설하지 않으리. (졸시 ‘고래’ 전문)
애초에 생각했던 필자의 논조에 크게 벗어나지 않을만한 ‘시로 읽는 세상’을 살피려다가 문득 졸시의 일부를 자리에 놓는 것으로 금주 필자의 역할을 마치기로 하겠다.

정윤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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