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 칼럼> ‘청년 양심수’ 조국과 ‘공안검사’ 황교안

<김주언 칼럼> ‘청년 양심수’ 조국과 ‘공안검사’ 황교안

  • 기자명 김주언 논설주간
  • 입력 2019.08.2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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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는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 통일까지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한꺼번에 던져지고 답을 요구하는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사노맹을 함께 했던 분들은 큰 흐름 속에서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에서 치열하게 자신을 던진 그룹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의 주역인 백태웅 하와이대 교수의 말이다.(2017년 SBS 인터뷰) 백교수는 20대 시절 “미래에 대한 종합적 대안을 갖지 못한 고민”은 “복잡다단한 우리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과 연결된다고 밝혔다.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도 사노맹 전력에 대해 비슷한 말을 했다. “20대 청년 조국, 부족하고 미흡했다. 그러나 뜨거운 심장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아픔과 같이 하고자 했다.” 조 후보는 “과거 독재정권에 맞서고 경제민주화를 추구했던 1991년 활동이 2019년에 소환”됐다며 과거활동을 자랑스러워 하지도 않지만 부끄러움도 없다고 강조했다. 20대 시절의 사회변혁을 위한 고민이 이상론에 치우친 행동이었음을 고백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화를 위한 열정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외침이기도 하다.
장관후보 인사청문회에서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던 20대 청년의 민주화운동이 뜬금없이 도마 위에 올랐다. 조 후보의 사노맹 전력을 두고 냉전세력이 철지난 색깔론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30년만에 사노맹을 소환한 사람은 공안검사 출신인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이다. 황 대표는 “사노맹은 사회주의혁명 달성을 목표로 폭발물을 만들고 무기탈취 계획을 세우고 자살용 독극물 캡슐도 만들었던 반국가 조직”이라며 “국가전복을 꿈꾸는 조직에 몸담은 사람이 법무부장관에 앉는 게 말이 되는 얘기인가”라고 말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황 대표는 독재정권 시절 공안검사로 활약했다. 황 대표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독재체제 수호자로서의 자긍심이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국가전복 세력’이 청와대 민정수석을 거쳐 법무장관 후보로 내정된 사실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을 좌우로 나누고 폭탄주도 오른쪽으로만 돌린다는 ‘미스터 국가보안법’의 눈으로 보자면 나라의 기초를 흔드는 엄청난 사건일 수 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권 학생들을 국가전복세력으로 치부해왔던 공안검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고나 할까.   
과거 독재정권은 민주화운동을 ‘용공’으로 몰아 탄압했다. ‘용공’(容共)이란 공산주의를 용인한다는 뜻이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데다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면 처벌하는 국가보안법이 서릿발처럼 짓누르던 시기였다.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가야 했다.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를 거쳐 국가정보원으로 개명)는 고문을 통해 간첩단이나 조직사건을 조작해냈다. 공안검사들이 이를 토대로 기소하면 법원은 기소내용대로 선고하는 게 다반사였다. 공안검사가 체제유지의 선봉장이었던 셈이다.      
과거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조직사건은 무수히 많다. ‘사법 살인’으로 일컬어지는 인혁당사건은 박정희정권이 유신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민주화운동(민청학련 사건)을 제압하기 위해 조작해냈다. 남민전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고문을 통한 강제자백으로 조직사건을 만들어냈다. 울릉도 간첩단 등 많은 간첩단 사건도 정보기관이 만들어낸 사건이었다. 많은 조직사건들은 40여년이 지난 뒤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관련자들은 국가배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였다. 
1993년 사노맹사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관련자들은 재판과정에서 안기부의 혹독한 고문사실을 폭로했다. 잠을 재우지 않고 옷을 모두 벗긴 뒤 구타하고, 심지어 성기고문까지 했다는 것이다. 고문을 못이겨 허위진술을 하고 자살을 기도한 수감자도 있었다. 백태웅교수는 당시 취조과정에서 3차례나 실신하기도 했다. 은수미 성남시장은 고문으로 감옥에서 사경을 헤맸다. 고문 후유증으로 소장과 대장을 일부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고 결핵이 후두로 번져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법원은 검찰의 기소를 받아들여 이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사노맹 중앙위원장이었던 백태웅 교수와 박노해 시인은 대법원에서 각각 징역15년과 무기징역형이 확정됐다. 이들은 1999년 김대중정부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은수미 성남시장도 6년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조국 후보는 1993년 6월 사노맹 산하기구인 남한사회주의과학원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대법원은 사과원을 반국가단체가 아닌 이적단체로 보고 징역1년, 집행유예2년을 선고했다. 조후보는 5개월만에 출소했다. 
사노맹사건은 당시 국제사회에서도 한국의 대표적 인권침해 사례로 꼽혔다. 국제앰네스티는 1994년 연례보고서에 사노맹 관련자들을 ‘불공정한 재판을 받았거나 가혹행위를 받은 정치범 및 양심수’로 포함시켰다. 국제엠네스티는 조후보를 ‘올해의 양심수’로 선정하기도 했다. 2008년 이명박정부의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는 사노맹활동을 민주화운동으로 평가하고 박노해시인과 백태웅교수 등을 민주화운동 인사로 인정했다. 심지어 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 ‘문재인 바람’에 맞설 인물로 백교수 영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백교수는 최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황대표가) 안기부에서 고문으로 조작했던 수사내용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가 그때 전복하려고 했던 것은 군사쿠데타로 광주항쟁을 짓밟고 들어선 독재정권이었다.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자유와 평등을 확대하는 것이 목표였다.” 백교수는 “국가전복 시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공안검사 출신인 황대표의 세계관이 아직도 독재체제가 정상체제라고 보는 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독재정권 시절 조작사건에 얽혀 고난을 겪었던 사람들은 30년이 훌쩍 넘어선 이후 재심을 통해 명예를 회복했다. 턱없이 적지만 국가배상도 받아냈다. 그러나 고문을 일삼았던 수사관이나 기소를 담당했던 공안검사들은 한마디 반성도 없다. 검찰총장이 포괄적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떵떵거리며 살아간다. 국가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최근 민변에서 국가배상을 받은 사건의 수사관이나 검사에게 국가가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며 청원을 냈다. 하지만 아직도 구상권이 청구된 적은 없다.  
그래선가. 황대표를 비롯한 공안검사 출신들은 아직도 냉전의식에 젖어 철지난 색깔론을 들먹인다. 황대표는 2009년 집회시위법 해설서에서 ‘4·19혁명은 혼란, 5·16군사쿠데타는 혁명’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아직도 당시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많은 공안검사 출신들은 과거의 ‘독재체제 수호자’ 시절을 잊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 변호사도 있지 않은가. 태극기 모독집회에서 ‘빨갱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와 인권,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으며 온몸을 불살랐던 청년, 그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장관후보로서의 포부를 내세운다. 독재정권에 부역하며 민주인사를 탄압했던 공안검사. 그는 아직도 냉전의식에 함몰돼 있다. 미국에서도 금기시됐던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정치인이 지난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한국사회에서 과거에 사로잡힌 ‘냉전좀비’는 진정한 민주사회를 가꿔나가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김주언(논설주간ㆍ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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