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옥의 샤머니즘 이야기] 요나를 삼킨 물고기 아프락사스를 향한 비월

[유명옥의 샤머니즘 이야기] 요나를 삼킨 물고기 아프락사스를 향한 비월

  • 기자명 데일리스포츠한국
  • 입력 2019.08.21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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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스포츠한국]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인 칼 융(Carl Jung)은 <변환의 상징>이라는 책에서 요나가 고래의 뱃속에 삼켜졌다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난 이야기를 분석하며 스위스의 의사이자, 철학자요, 연금술사였던 파라셀수스(Paracelsus: 1493-1541)가 ‘폭력적인 미스테리아(Gewaltige Mysteria)’라고 표현했던 단어를 차용했다.

“요나가 고래에 의해 삼켜졌을 때, 그 때 요나는 포악한 것의 뱃속에 간단히 잡혀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이미 파라셀수스가 ‘폭력적인 미스테리아’라고 말했던 것을 보았던 것이다”

융의 표현을 살짝 빌자면, 인간 무의식의 심연 속에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귀한 보물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영롱하게 빛나는 진주로 특정되는, 연금술사였던 파라셀수스가 ‘미스테리움’이라고 이름을 붙인 ‘탁월한 신비적 황홀(법열)’을 의미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초월적인 삶과 자기실현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열쇠는 무의식으로의 퇴행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인간의 무의식은 바다로 상징된다. 이 과정을 통해 초기 어린 시절의 성장 과정으로 되돌아가 모성적인 육체에 머물러 있는 리비도(Libido)의 상태를 확인하고, 내적인 성장을 위한 연결고리의 암시를 찾는 것이다.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에서 바다는 어머니를 상징하고, 요나를 삼킨 물고기의 뱃속은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한다. 요나가 고래의 뱃속에서 삼일 동안 죽었다가 살아났던 것처럼, 유리의 마른 늪에서 낚시질을 하는 주인공은 엄니의 “형태는 보이지 않는 남근을 싸아안고 있는 요니” 속에서 상징적인 죽음을 통해 일상적인 인간으로서의 “어떤 한계나 장애로부터 비월(飛越)해가며, 더 크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마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말했던 아프락사스(abraxas)처럼 말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고 한다. (계속)

※ 여기 연재되는 글은 필자 개인의 체험과 학술적 자료를 바탕으로 집필한 개인적 견해이며 특정 종교와 종교인 등과 논쟁이나 본지 편집방향과는 무관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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