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 칼럼> 한일 무역전쟁과 ‘1965년 체제’의 극복

<김주언 칼럼> 한일 무역전쟁과 ‘1965년 체제’의 극복

  • 기자명 김주언 논설주간
  • 입력 2019.08.11 08:19
  • 수정 2019.08.15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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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부가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우대국)에서 제외하면서 ‘총성없는 경제전쟁’이 시작됐다. 한일갈등은 1965년 수교 이래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 기업과 국민에게는 어려움을 극복할 역량이 있다”고 다짐했다. 한달동안 지속된 일본제품 불매운동도 날로 확산되고 있다. 시민사회는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징용 사과하라”며 아베규탄 촛불시위를 열었다. 일본의 ‘경제침략’에 대응하는 국민적 분노가 들끓고 있는 것이다.
한일 간에는 불행한 과거사로 인한 깊은 상처가 놓여 있다. 문대통령의 지적처럼 양국은 오랫동안 상처를 치유하려 노력해왔다. 그러나 가해자인 일본이 오히려 상처를 헤집고 나섰다. 학자들은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원인을 ‘1965년 체제’로 꼽는다.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 협정을 체결하여 국교를 정상화한 해이다. 그러나 조약 및 협정에 대한 양국의 해석이 달라 갈등과 불신의 씨앗이 되었다.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부교수는 핵심사항으로 ‘식민지배의 불법성 문제’를 꼽는다.
한반도를 강제로 점령하고 약탈을 자행한 일본은 1965년 6월22일 한국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양국 대표가 서명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에는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에 관한 사죄표명이 없다.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청구권 자금 3억달러(10년동안)와 장기저리 차관 2억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기본조약을 서둘러 맺도록 했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굴욕적 한일회담’을 막으려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대학에 휴교령을 내린 뒤 면죄부를 주어버렸다. ‘6ㆍ3사태’이다.
첫단추부터 잘못끼운 한일수교는 반세기가 넘도록 양국을 갈등 속으로 몰아넣었다.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해 불법성을 전제로 한다. 이에 반해 일본은 합법으로 해석한다. 한일은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합의할 수 없음에 합의’하는 형태로 봉합해왔다. 한국이 과거사에 대해 사죄와 반성, 배상을 요구할 때마다 일본정부가 내세운 논리도 여기에 있다. 아베 신조 총리가 한국 국민을 농락하는 언동을 일삼는 행태의 뿌리이다.
굴욕적 한일협정이 체결된 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이다. 1951년 9월8일 일본과 48개국 사이에 맺어진 전후 평화조약을 말한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주권을 회복해 독립국의 지위를 얻었다. 동북아 전후체제인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이 조약에서 한국은 배제됐다. 초안에 한국은 ‘연합국 및 협력국’ 명단에 있었다. 한국이 수십년 동안 항일저항 및 전투기록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바뀌었다. 일본을 냉전의 교두보로 활용하려는 미국의 전략과 일본의 끈질긴 요구로 한국은 서명에 참여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독도문제의 씨앗이 뿌려졌다. 영토문제를 다룬 2장은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에 대한 모든 권리 자격 영유권을 포기한다’고 되어 있다. 초안에 들어 있던 독도가 빠진 것이다. 청구권도 비슷한 맥락이다. 14조는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국가의 범위를 ‘일본군에 의하여 점령되고, 일본군에 의해 손해를 입은 연합국’으로 제한했다. 따라서 식민지였던 한국과 북한은 포함되지 않는다. 전승국인 미국과 영국은 청구권 포기를 선언했다. 일본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맺어진 날 미일안보 조약이 체결됐다. 일본은 연합국 점령지에서 회복되던 날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일제 식민지배의 적법성과 배상문제를 둘러싼 논란의 불씨가 되었다. 조약 4조는 ‘일본의 통치로부터 이탈된 지역의 재산상권리 문제는 해당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특별약정으로 처리한다’고 되어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종용으로 한일예비회담이 시작됐다.
한일협상은 15년여 걸렸다. 한일청구권협정에는 식민지배가 ‘무효(null and void)’라고 되어 있다. 협상과정에서 앞부분에 ‘이미(already)’라는 표현을 넣자는 일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이를 두고 일본은 1910년 병합조약은 합법적이었고 1945년 8월15일에 해소된 것으로 해석했다. 한국은 병합조약이 원천적으로 불법이므로 무효라고 보았다. 더구나 일본은 청구권자금 3억달러를 ‘독립축하금’으로 보고, 협정은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각서라고 주장한다.

경남연구원 이관후박사는 무역전쟁의 도화선이 된 대법의 강제징용배상 판결의 핵심을 식민지배의 불법성으로 보았다. 대법이 불법적 식민지배와 전범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전제로 강제징용 피해자의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한일 간의 청구권협정 해석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불완전한 협정에 따른 개인청구권 해소를 법적으로 확정할 수 없다. 따라서 한국헌법에 불법으로 규정돼 있는 식민지배에 대한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 판결은 냉전시기에 만들어진 샌프란시스코 체제와 1965년 체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신호이다. 불평등 조약에 따른 체제는 더 이상 존속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의 ‘1965년 체제 청산위위원회’ 제안도 이런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심대표는 (일본 정부는) “불평등한 1965년 체제를 존속하면서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인권문제를 묵살하겠다는 것”이라며 “침략당사자인 일본의 사죄와 책임을 분명히 하는 해법이 마련돼야 한다”고 제안이유를 밝혔다.
아베정부와 달리 과거 일본은 수차례에 걸쳐 식민지배에 유감을 표명했다. 1993년 고노담화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했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는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은 한국 국민을 지칭해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다. 2010년 간나오토 담화에 이르러서는 식민지배가 한국 국민의 의사에 반한 것이었음을 인정했다. 아베 총리는 이를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1965년 체제를 넘어서려면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문서화하여 한국과 일본이 공유해야 한다. 나아가 이를 징검다리 삼아 북한과 일본이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공유한다면 북일수교의 기초가 될 수도 있다. 2002년 북일 공동선언에서 일본이 약속한 경제협력이 배상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베 정부는 동북아평화체제를 위한 외교협상에서 고립되지 않기 위해 북일수교를 추진하고 있지 않은가.
한일과 북일이 공유한 인식을 남북일 공동선언으로 엮어낸다면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한 과거사를 극복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반도 평화와함께 신한반도체제가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남기정교수의 제안이다. 그러나 아베 정부의 행태를 보면 성사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놓아 두어서는 동북아 평화체제는 요원할지도 모른다.

일본의 무역전쟁 도발은 한일관계가 아직도 불평등조약체제로 진행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1876년 일본의 강요로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이후 한일협정에서도 불평등조약을 정상화하지 못했다.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평화체제의 구축을 위해 1965년 체제는 이제 종식돼야 한다. 박정희 박근혜 부녀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굴욕적 협상은 냉전시대의 유물로 청산돼야 할 과제이다.

김주언(논설주간ㆍ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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