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천 칼럼> ‘서정시와 같은’ 풍경과 ‘서정시가 아니어도 된다’는 순간의 길항(拮抗)

<정윤천 칼럼> ‘서정시와 같은’ 풍경과 ‘서정시가 아니어도 된다’는 순간의 길항(拮抗)

  • 기자명 정윤천
  • 입력 2019.08.0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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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하루가 붉은 얼굴로 내려다보며 있고는 하였다. 한번 생각났던 일들은 잊혀 질 때까지 잊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번번이 늦게 도착하고는 하였다. 그럴 줄 몰랐다고 하는 말을 들어야 할 때가 제일 슬펐다.
지상의 것이 아닌 표정들로 장미꽃들은 피어났다.장미꽃이 생각났던 시간이 지나가지 않고 있었으므로 살얼음이 낀 강을 건너야 너에게로 닿을 수 있는 길이 남아 있었다.
여기는, 장미에 관한 영화(榮華)를 찍고 간 자리라고 하였다. 내 시에서는 가급적 한 송이의 장미도 남아 있지 않았으면 싶었다”
위에 새겨진 인용문구는 필자의  최근 시집 '발해로  가는  저녁'의 자서에 허심탄회 붙여 보았던 얄팍한 글줄의 내용이다. 행간의 영화라는 단어는 영화(映畵)로 읽혀도 무방할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영화의 시절 속에 살고 있는 중이거나 거기 함께 묻어가는 걸음질 속에 있었다. 넘치는 불빛들의 은성함과 지천으로 널린 물목들의 세례와, 문자보다 흔해빠진 영상의 사태들에게로 사로잡혀 있곤 하였다. 그렇게 우리들은 무언가를 열심히 찍어내어 실제의 영화(映畵)들보다 갈급하게 성근 화면들을 토해내고 있었고, 있었으나, 그것들은 거의 시의 영역과는 멀리 떨어져 보이며 있었다. 비애도 탄성도 초를 다투어 일어나고 다시 그만큼이나 빠르게 소멸되곤 하였다. 이른바 이런 마음씨의 소치들은 우리들도 모르는 사이의 영화와 영화의 중독에 다름 아닌 병증이었을 것도 같았다.
무슨, 흔적을 더듬어 본다는 행위이거나 상상이 우리들의 현대 앞에서 가능하기는 한 일이었을까. 우리에게는 비극적이거나 비극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의 골인 개수라거나 방어율 따위에 기댄 대리만족의 허망한 순간들을 떨치고 온, 제각각의 열망이라는 날선 단어가 가슴에 남아서 존재하기는 하였던 것이었을까. 그렇게 완벽하게 졸도한 “서정시”를 기억해내려 하였던 나의 열망과 열정은, 어쩌면 그 초입에서부터 오래 전에도 벌써 언급되었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소고 (小鼓) 소리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쇠 치는 대장간이 남아 있었다 튀밥 솥 엉덩이 아래가 금방이라도 열릴 듯했다 국밥집 앞에는 그런대로 줄어져 가던 사람 띠가 늘어서 있었다 대장간 안이 외따로웠다 호밋자루를 고르는 노파의 손길이 재작년보다 주저거렸다 밥값도 못 건진 풍구불이 꺼져가는 소리를 내었다 대장간이 남아 있었던 근처에 거기 붙어 있던 대장장이의 팔뚝이 자랑스러웠다 국밥집 돼지 창자 냄새가 그리 떳떳하지는 않았다 국밥만 하고 간다는 발걸음 하나가 갈지자를 그었다 막걸리도 몇 사발 껴들었던 것 같았다 튀밥 솥 밑에서 봄꽃이 피든 소리는 변함없었다 자랑스럽거나 부끄러웠다는 말들이 그저 한 몸 같았다 화순이나 담양 장날 해름참 같았다. 졸시 ‘서정시 같았다’ 전문
우리에겐 어느새 “자랑스럽거나” 아니라면 “부끄러운”장면만이 들려져 있었다. 그것은 거의 맹신과도 같은 이분법의 방식으로 커져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자랑스럽지 않은 것들은 당연 부끄러웠으므로, 우리들 생계의 법칙은 두 난간 위에 걸쳐져 서로가 위태로워져만 가는 것 아니었을까. 하지만 자랑스럽지 않더라도 최소한 부끄럽지 않아도 되었던 날이 우리에겐 한사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을까. “튀밥 솥 아래 봄꽃이 피든 소리는 변함 없었”던, 그리하여 그 장면은, 당대에 이르러 완벽하게 소실되어져 가기 시작하는 “담양이나 화순 장날의 해름참” 같기도 하였다는. 일견 이 글 집에서 마주치는 “서정시”의 남루한 풍정으로 되돌려져 “서정시 같았다”는, ‘갑골문’이 질러보는 ’난장이의 소고‘소리에 닿아 있었을 것 같기는 하였겠으나,
(전략) 시(詩)보다 서둘러서 물구나무를 서보이기 시작한다// 등딱지에서 꺼내든 저마다의 날개 위에 새벽의 습기를 닿게 하려고 거저리**들이 나미브***에서 생을 구하는 자세// 그러려니 생은 아름답지 않아도 된다 대가리를 거꾸로 처박고 폼이 나지 않아도 되고 정전이 되어 한동안 불이 들어오지 않아도 되고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 같은 건 외우지 않아도 된다// 만다라 꽃씨보다 작은 습기의 알갱이들이 날개에 맺혀 물구나무의 맨 아래에 붙은 입술까지만 닿으면 된다 서정시가 아니어도 된다.
** 풍뎅이의 일종,  *** 지구상의 가장 오래된 사막.
졸시 ‘서정시가 아니어도 된다’
하지만 굳이 “서정시가 아니어도 된다”는 명제가 우리들의 현실에게도 유용할 법 하였다. 산술적으로 따지면, 인간의 “히말라야”보다 두 배나 높게 여겨진다는 “나미브”의 모래 언덕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마다 올라서야 하는 “거저리”들의 행렬. 물구나무의 자세로 날개를 펼쳐 거기에 닿게 하려는 미량의 습기로 살아가는 그들의 일생 앞에서, 한갓 서정시 놀음 같은 건 “아니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모든 시인들이 시로써 호명하여 보거나 열망하여 보았던 목측(目測)의 거리들은 이내 마음으로나마 가보고 싶었거나 가까워져 보려 하였던 갸륵한 통점의 지점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윤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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