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천 칼럼> 멀리서, 먼 데서 왔던 순간

<정윤천 칼럼> 멀리서, 먼 데서 왔던 순간

  • 기자명 정윤천
  • 입력 2019.07.18 10:57
  • 수정 2019.07.18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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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에서 온 비보 같았다/ 내가 아는 발해는 두 나라의 해안을 기억에 간직하고/ 있었던 미쁘장한 한 여자였다/ 마을에서는 유일하게 자전거를 다루어 들을 달리던/ 선친의 어부인이기도 하였다/ 학교 가는 길에 들렀다던 일본 상점의 이름들을/ 사관처럼 늦게까지 외고 있었다/ 친목계의 회계를 도맡곤 하였으나/ 사 공주와 육 왕자를 한 몸으로 치러 냈으나/ 재위 기간 태평성대라곤 비치지 않았던/ 비련의 왕비이기도 하였다

막내 여동생을 태우고 발해로 가는 저녁은/ 사방이 아직 어두워 있었다/ 산협들을 연거푸 벗어나자/ 곤궁했던 시절의 헐한 수라상 위의/ 김치죽 같은 새벽빛이/ 차창에 어렸다가 빠르게 엎질러지고는 하였다/ 변방의 마을들이 숨을 죽여 잠들어 있었다

병동의 복도는 사라진 나라의 옛 해안처럼 길었고/ 발해는 거기 눈을 감고 있었다/ 발목이 물새처럼 가늘어 보여서 마침내 발해였을 것 같았다/ 사직을 닫은 해동성국 한 구가/ 미처 닿지 않은 황자나 공주들보다 먼저 영구차에 오르자/ 가는 발목을 빼낸 자리는/ 발해의 바다 물결이 와서 메우고 갔다 발해처럼만 같았다.

-<발해로 가는 저녁> 전문

(전략) 시 공간의 초월과 그 교감적 공생, 서사시적 대상과 서정적 상관물의 겹침(overlap)을 통한 알레고리적 상황의 탄생, 시적 서술 화법의 반복을 통한 뉘앙스의 발생 같은 매우 유의미한 방법론이 「발해로 가는 저녁」에는 늡늡하고 유장하게 저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의법적 관점에서의 발해(渤海)의 환생(rebirth)은 국가와 개인이라는 대척적이고 대칭적인 상관성을 하나의 유기체적인 관점에서 쇠락하는 존재의 숙명적인 비유(metaphor)로 환원해 내는 저력을 선보인다. 암연히 사라져갔을 왕국과 쓸쓸히 유명(幽明)을 달리하는 개인의 숙명의 교차는, '있었다'와 '하였다'와 '같았다'라는 단순한 서술어를 존재의 숙명을 다루는 변증법(dialectic)적 화소(話素)로 적절하게 활용되는 분위기다. 즉 '있었다'라고 하는 본태적(本態的)인 피동성의 서술과 '하였다'라는 능동성(能動性)의 서술이 변증해내는 다양한 인생의 희비곡절과 우연과 필연의 갈마듦은 '발해'라고 하는 개인의 왕국 혹은 왕국으로 비견되는 개인을 중층적으로 발생시킨다. 그것은 곧 '같았다'라고 하는 인생 전반 혹은 국가 흥성과 쇠말(衰末)이라고 하는 긴 시간의 파노라마를 '발해'라고 하는 잊힐 뻔한 왕국의 콘텐츠로 개연성있게 비견하는 서술이기도 하다.(하략)

정윤천 시집 <발해로 가는 저녁>에 대한 유종인 시인의 해설 일부.

오늘은 불가분하게 사적인 이야기로 이 원고를 시작하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기다란 인용문을 앞에 놓는 이유부터 밝혀야만 될 것도 같다. 이는 십 년 가까운 세월을 게으르게 지나와 이제 막 세상에 선을 보인 한 시인의(필자) “시집”에 관계되는 서술이라는 점이다. 인용 시 “발해로 가는 저녁”의 전문은 이 시집의 표제 시이고, 아래에 곁들인 다소 무거워 보이는 두터운 문장들은 시집의 말미에 곁들여진 해설의 일부이다.

‘소멸’을 목전에 두었던 노모는 이승의 극지들을 두루 거치고 난 연후에 한 요양병원의 침상 위에서, 그렇게 이곳이거나 그곳에서의 스스로의 기억들을, 언젠가 사라지고 없는 “발해”라는 나라의 이름 같이는 거두었던 채로 있었다. 비보를 접하고 찾아간 자식의 시선 앞으로 “물새처럼 가는 발목”으로 남아 바라보이던 한 존재의 심연 속으로는, 먼데서 내게로 왔던 소멸의 살풍경 하나가 먼저 와서 자리 잡고 있었다. 순간처럼 영원처럼, 한 여인네의 일생이 내게는 처연한 상상력 속에서의 “발해”처럼만 같이 비쳐져 왔던 순식간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그렇게 내게로 부터 떠나가 버렸고, 그녀에게서보다 더 멀리서, 먼 곳으로부터 한 편의 시가 찾아왔던 셈이었다. 비단 오고 간다는 엄연함의 매순간들이 시에서 뿐 이었으랴만.

오늘은 이렇게 한 사람(필자)에게서 비롯된 시에 관한 내연이거나 감상(?)으로 지면의 역할을 감당하여 보기로 한다

당신이 멀리 있어서 봄비가 내렸습니다// 가난한 사내가 누군가를 사랑해서 눈이 내린다는 백설(白雪의 문장 한 줄이 불어가고 난 뒤에서 그랬습니다.

<내가 읽었던 가장 아름다운 시의 제목> 전문

“정윤천 시인에게 있어 일종의 유연함이나 선량한 무기력함의 포즈는, 강퍅하거나 강골의 시적 피력(披瀝)이 오히려 더 소통과 정서적 교호(交互/交好)를 방해한다는 암묵적인 깨달음을 보여주는 증좌가 아닌가 싶다. 그런 무기력함이란 실상 대상과 그 주변의 세상을 더 드넓고 섬세하게 품어 안으려는 늡늡한 마음의 겨를이 계제(階梯)하는 순간의 심리적 번짐일 수 있다. 시의 제목(title)이 시의 내용(contents)으로 선회되는 이러한 시적 번짐은, 마치 과거와 현재가 너나들고 미래와 오늘이 내통하는 사랑의 이력을 보여준다. 이는 “가난한 사내가 누군가를 사랑해서 눈이 내린다”는 언술 속에 물리적인 인과율(因果律)의 예술적 파괴인 동시에 그 확장에 갈음하는 바가 있다. 그렇게 해서 “당신이 멀리 있어서 봄비가 내”린다는 일견 황당하고 소슬한 언명조차 끝내는 마음이 이룩하는 “백설(白雪)의 문장 한 줄”로 오롯해지는 심사를 도드라지게 한다. <유종인의 해설문 일부>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가 물론 이 시의 전제이자 질료였던 셈이다. 아직도 미궁을 헤매고 있는, 우리들 세간의 무수한 막무가내들과 불통과 반목들을 향하여, 이 세간에서의 가장 변방 사람일지도 모르는 한 시인은, 그러나 막무가내로 또 한 편의 시와 시구를 이 세상의 가운데로 밀어 넣어 놓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윤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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